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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지막 희망

Flyturtle Studio 2012. 2. 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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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과 시련의 존재가 너무 커서 인간이란 존재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행과 시련에 부딪치고 저항해 봐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단두대에 목을 내민 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행 앞에서는 나약했던 비겁한 인간의 의지가, 오래 지나지 않아 선택해야 할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 유감이지만 마 선생님의 수명은 앞으로 약 육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 초침 소리가 째깍 째깍 크게 울려댔다. 주치의는 대단히 사무적인 태도로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민원처리 결과를 통보하듯이 나에게 사형선고를 했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육 개월?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주치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어려운 의학용어가 적힌 차트에만 시선을 주며 볼펜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 통증을 줄여드리기 위해 신경 파괴 수술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는데, 마 선생님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드릴 수 있습니다. 시술을 받으시겠습니까?

신경파괴수술. 1년 미만의 시한부 환자에게만 시술된다는, 기적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만 시술된다는 그 수술을 나에게 받으란 말인가.

그 순간 머리로 온 몸의 피가 치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노가 솟구쳤다.
근 5년간의 삶을 거의 이 병동에서 보냈다. 계속되는 고통스러운 항생제 치료를 견뎠고, 침인지 피인지 구분이 안 가는 액체를 수돗물처럼 토해내며 견뎠고, 수없이 맞은 링거와 주삿바늘로 인해 피멍이 든 것도 견뎠고,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온 몸의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도, 내장이 찢겨나가는 듯한 아픔도 견뎠고, 각종 제제로 범벅된 약인지 죽인지도 모를 쓰디쓴 식사로 한 끼 한끼를 때우는 것도 견뎠고, 여섯번이나 수술을 받아,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죽은 시체처럼 이곳저곳에 찢겨진 듯한 흉터도 낫기 위한 영광의 훈장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캅카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것 같은 지옥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 병원에서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것만 같던 고통을 인내하며 버티고 견뎌낸 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강하게 살아서 두발로 병원 문을 걸어나와 세계의 따뜻한 햇빛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는 완치될 수 있다는 믿음.
내 앞에 있는 이 주치의는 희망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의 밧줄에 매달리게 해주었던 이놈이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 지금 장난하는 거요? 고칠 수 있다며...고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하지만 반드시 완치할 수 있다고 한게 누군데···. 왜··· 왜 그런 말을 이제 와서야 하나? 왜······.

나의 부족한 언어 구사력과 분노가 뒤섞여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주치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엄청난 분노가 교감신경을 자극하여 아드레날린을 끊임없이 내뿜게 했다. 주치의의 안경이 깨지며 그 파편이 희망과 같이 바닥으로 산산히 흩어질 때 까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밖에서 간호사가 들어와 비명을 지르지 않았더라면, 손에 칼이라도 쥐어져 있었다면 반드시 주치의를 죽였을 것이다. 반드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져 주먹질을 멈추었다. 주치의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사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먹으로 맞았다고 해도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의 희번득한 눈자위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안정을 찾았다. 주치의는 놀란 간호사에게 나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 마 선생님의 병은 매우 드문 케이스였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악화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신경 파괴 수술밖에 대안이 없습니다.
― 뭐요? 지금 그게 뚫린 입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을 말인가? 몰랐다고 하면 다야? 신경파괴수술을 받으라고? 나더러 사람의 기능을 포기하라는 것 아닌가?

이 의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한 채 나를 식물로 만들 셈인가. 만약 그 수술을 받으면 나는 몸이 죽기 전에 정신이 먼저 죽는다.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무거운 정적이 진료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하여 억겁의 시간 속을 방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침묵. 그리고 침묵.
침묵.
결국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나였다.

― 정말···내가 죽는 거요···?

이 말을 내뱉을 때 까지도 나는 부서진 희망의 파편을 꼭 쥐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꼭 그런 비참한 꼴이었던 것이다. 분노에 의해 부풀어 오른 풍선이 바람이 빠지고 본 상태로 되돌아왔다. 비겁한 인간의 정신이 희망의 파편을 꼭 쥐고 의사의 권위에 굴복하게끔 만든 것이다.

― 신경 파괴수술을 시술받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대안이 없습니다. 신경 파괴수술을 받지 않으실 거면 제가 아는 대체 의학요법 전문가를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렸다. 대체의학이란 일종의 임시방편 아닌가.

나는 악다문 이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짤막하게.

― 퇴원하겠소.

그 말을 내뱉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신조차 모를 것이다. 나는 퇴원하겠다는 그 말로써 희망을 버렸다. 그것은 뱃속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듯 한 아픔과 공허의 절규였다.

문득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주치의를 바라보자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자책감을 느끼는 듯이 보였지만 나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창가에 올해 첫 눈이 조용히 내리는 것이 보였다.

추운 저녁이었다. 병원에서 진통제를 잔뜩 싸가지고 나왔다. 생각 외로 짐이 별로 없었다. 그 가벼움에 아주 허탈했다.

진통제 병 꾸러미들을 바라보았다. 마약성분이 잔뜩 들어있는 이 진통제들. 한꺼번에 먹으면 아마 죽겠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데, 그때까지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차라리 이 약들을 한꺼번에 먹고 편하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절망과 고립감이 자살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 죽음을 바라는 것도 하나의 욕망일 수 있다니.

깨진 삶의 파편들이 모래를 쥔 것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진통제 병 꾸러미들을 만지작 거리다가 이내 가방속에 넣었다.

이제 어디를 가면 좋을까. 집은 거액의 수술비와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팔아 치운지 오래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갈 곳이 없구나.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쌀쌀하고 추웠다. 겨울의 날카로운 바람이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병원 밖은 마치 죽은 원귀가 떠도는 듯한 망자들의 세계로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병원 안에서는 갇혀있는 듯한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색 가로등 아래, 그들은 무심히 제 갈길만 가고 있었다. 조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세계가 이 세상의 모습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어떤 한 가족에게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부부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딸로 보이는 6세 정도로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 그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부모의 손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죽은 자의 무덤 속 같은 세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보석같은 느낌이 들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족이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여 불현듯 나의 가족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게 했다. 내게도 가족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나에게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과 형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고 군인이었던 형은 탄약창에서 근무 중 불발탄이 터져 목숨을 잃었다. 떠올리기에는 너무 아픈 기억들 뿐 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불행에 빠져 있는데 왜 저 가족은 행복에 젖어있는가.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나에게는 왜 짊어지지도 못할 거대한 불행을 주고, 저들에게는 어째서 행복을 주는 걸까?
이 세상이 비 합리적이며 불공평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곧 내가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소년 시절에 비합리와 불공정에 대해 느꼈던 레지스탕스 같은 괜한 저항정신이, 악마의 기운에 오염이 되어 그 역겨운 질투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 내 영혼의 고통과 육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도 겪게 하여 그것을 느껴봐야 된다.

인간의 껍질을 깨고 내재된 괴물의 흉측한 모습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내 정신을 재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재앙을 잉태한 분노라는 이름의 어머니였다. 그 분노의 어머니가 나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게 하라. 너의 고통을, 너의 목마름을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라. 괴물이 되어라. 재앙을 낳아라.

분노는 삶의 원동력이다. 분노함으로써 인간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분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되면 어떻게 되는가. 분명 그것은 상상도 못할 재앙을 낳는다. 나는 그 가족을 보며 재앙을 탄생시키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이다. 희망을 버린 자가 분노를 불태워 해야만 할 일을 정했다.
부부로 보이는 남자 여자, 그리고 꼬마 여자아이. 그 가족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햄버거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의 밝은 불빛에 밝은 곳을 싫어하는 바퀴벌레처럼 그들을 쫓아 들어가길 망설였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가족은 햄버거를 주문 중이었다. 나는 뒤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려는 척 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였다. 보통의 가족들이 나누는 그런 대화. 행복해 보였다.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니. 단 하나의 욕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괴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이 세상에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된다. 쉽게 아물지 못할 큰 상처를. 괴물이 되자.
햄버거를 주문한 가족은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햄버거 가게의 직원들과 몰래 쫓아온 그 가족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햄버거를 하나 주문하여 먹는 시늉을 했다. 내 몸은 이미 액체가 아닌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빨로 잘게 씹은 햄버거를 햄버거 봉투에 뱉으며 햄버거를 씹고 있었다.

― 엄마 유치원에서요 지혜가 나한테 인형 줬어

― 그래? 너도 다음에 지혜에게 선물을 해 줘야 겠구나? 선물 받고서 고맙다는 말은 했니?
― 응. 했어.

모녀의 이런저런 대화를 들으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다리면 때는 올 것이다. 어느 순간 남자가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섰다. 남자는 화장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꼬마아이의 엄마가 자기 딸의 입술에 묻은 음식물 조각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는 이 순간. 이때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엄마의 앞에 앉아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 여자는 벙찐 표정으로 나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예측 밖의 상황이 벌어지면 당황하기 마련이니까.

햄버거 가게의 박차듯이 열고 나와 미친듯이 뛰었다. 한참 후에야 뒤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 유괴범이야! 유괴범이에요! 사람 살려!

달려라. 달려라. 멈추는 것은 죽는것과 다름없다.

어둠속으로, 깊은 어둠속으로 내달렸다.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안겨줄 인간이 잡히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 상처를 남기려고 뛰고 있었다.
폐가 터질것만 같았다. 고통과 육신이 용해되고 있었다. 추한 쓰레기. 더러운 동물. 건전한 사회에 있어서 나같은 존재는 이대로 달리다가 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죽으면 그것도 운명이겠지.
거리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나를 사람들의 시선과 추격에서 보호해주었다. 이 어둠은 바로 죽을 때 내가 끌어안고 가야 할 고독한 운명의 짙은 색 이었다. 아직도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는 눈이 얼굴에 부딪혀 튕겨나가는게 느껴졌다.
뛰는 중에 힐끗 뒤돌아보니 저 멀리 나의 존재를 찾아 헤메는 방황하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타인의 고통에 일그램 무게의 관심도 주지 않던 이들이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느낄 수 없는 환희와, 정상적인 인간이 느끼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 아저씨 누구예요?

한참을 뛰고 있는 도중에 안고 있는 여자 꼬마아이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내가 누구냐고?

― 나도 한때는 너처럼 행복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겪게 해 줄 사람이지.

차갑게 대답했다. 그 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꼬마가 아무리 울고 칭얼거려도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꼬마를 죽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부터 괴물이 되려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온기가 아니라 냉혹한 악마의 머리다. 괴물은 이 아이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나약하고 비겁한, 다른 존재의 행복을 질투하는 괴물.

얼마나 뛰었을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빌딩 사이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시멘트 벽이 내 등에 닿으며 냉기가 올라왔다. 그 냉기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고통을 주었다.

― 아저씨 집에 가고 싶어요.

꼬마가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꼬마의 예쁜 빨간 코트가 떨고 있었다. 여기서 죽일까? 잠시 망설였다. 이제 곧 괴물이 될 인간이 잠시 망설인다는 것은 괴물에게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꼬마의 금방이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듯한 가냘픈 목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망설임.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는 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아저씨 말만 잘 들으면 엄마 아빠에게 데려다주마.

나도 모르게 꼬마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는 결심을 어기고 말을 붙였다. 엄마 아빠에게 온전히 데려다준다? 있을 수 없는 약속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는 울음을 멈추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꼭 데려다줘야 해.

내가 어떤 인간이 되려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마음 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니 과연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무가치한 것인가.

벽에 등을 붙이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꼬마를 안고 길을 걷다가 지하철 역사를 발견했다. 역사를 보는 그 순간 악마가 생각했을 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꼬마를 데리고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맞은편에서 무전기를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사람 두 명이 보였다. 경찰이었다. 긴장했지만 그들은 나를 그냥 지나쳤다. 꼬마는 경찰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서워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아저씨 쉬 마려워. 쉬할래.

개찰구에서 표를 끊고 승강장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 꼬마가 소변을 보고 싶다고 했다. 어쨌든 미리 볼일을 보게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꼬마가 도망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감시를 위해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꼬마를 좌변기가 있는 칸으로 밀어 넣기 전에 물어봤다.

― 너 혼자 쉬 할수 있어?

― 응 나 혼자 쉬할 수 있어
―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문 닫고 쉬야 다 하면 나와.

화장실 안의 사람들이 남자화장실에 왠 꼬마 여자아이가? 라는 시선을 주다가 나를 보고는 관심을 끊었다. 어쨌든 아버지와 어린 딸이 어쩌다가 남자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상식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법할 일이다. 그들은 나를 이 꼬마의 아버지로 생각할 테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문득 화장실 안이 덥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겨울이라 역사 안은 난방이 되고 있을 것이다. 세수라도 하려고 세면대 앞으로 가서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올렸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광대뼈만 퀭하게 튀어나온 수척한 얼굴,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 하얗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 입술 껍질 사이로 검게 배여 있는 핏자국···.
그리고 공허한 눈동자. 한치 속을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어두운 색을 지닌 괴물의 눈동자였다.
불현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거지? 화장실 칸으로 뛰어 들어갔다.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몰려왔다. 토할 것이 없는데도 내 몸은 무엇인가를 밖으로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변기에 대고 몇 번 심하게 토악질을 했다. 심한 몸 떨림과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육신의 고통이 점차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고통의 파도 속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진통제를 찾을 정신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간신히 가방속에서 진통제를 꺼내 뚜껑을 열어 몇 알을 입에 털어넣었다. 마약 성분의 강한 단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래. 이렇게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벼락을 맞아 죽은 로마의 카루스 황제보다는 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저씨 어디있어?

고통의 파도 속을 헤엄치고 있는 와중에 그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제 정신을 차려 입술을 열었다.

― 응 아저씨 화장실 칸 안에 있어.

― 나 쉬야 다했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라서인가.

― 꼬마야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저씨 곧 나갈게.

― 응

호흡이 여전히 불안정했다. 빠른 호흡을 고르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열었을 때 만약 꼬마가 없다면 왠지 다행스러울 것 같다고.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 칸의 문을 열었다. 꼬마는 내 앞에 서 있었다.

― 아저씨도 쉬 했어?

― 그래. 그렇단다.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 꼬마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 너 왜 다른데로 안 갔어? 아저씨가 너 싫은데도 데리고 왔잖아?

― 아저씨가 약속했잖아. 아저씨 말 잘 들으면 엄마한테 아빠한테 데려다 준댔잖아.

조그마한 목소리로, 하지만 나에게 칭찬이라도 받으려는 듯 믿음과 확신을 가진 눈빛을 보내며 그 꼬마는 나에게 말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정해진 운명 앞에서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도 같고 믿음이라는 것은 절망 앞에서 헛된 것 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아이의 눈은 맑고 깨끗했다.
꼬마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전철이 오는 것 같았다. 전철이 역에 도착할 때 들리는 음악소리가 들렸다. 꼬마의 손을 잡고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갔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된다. 세상에 고통을 안겨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에게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했다. 내가 존재했었다는 증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옥의 엔터테인먼트는 내 옆에서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이 꼬마의 죽음으로써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떨리는 손으로 꼬마를 안아들었다. 저 멀리서 포효하는 듯한 전철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제 이 손으로 이 꼬마를 전철 선로에 던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모든 행위가 완성된다. 나만을 위한 예술이 완성된다.
그런데 나는 최후의 최후에 무엇을 망설였던 것인가.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최후의 어떤 의지가 나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괴물에게 먹혀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인간성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나는 입술을 터뜨릴 듯이 꽉 깨물었다.
전철에서 내뿜는 밝은 빛이 보였다. 전철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손을 놓자. 손을 놓자. 손을 놓자.

― 꼬마야. 그런데 네 이름도 안 물어봤구나. 네 이름은 뭐니?

떨리는 목소리로 꼬마에게 물었다. 조금만 있으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꼬마에게 했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만물의 이치를 따르고 있어, 나에게 부여된 어떤 사명이 있었다면 내가 꼬마에게 이름을 물어본 것은 반드시 해야만 했을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내 이름은 희망이예요. 희망이.

― 아...

그 순간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포기해버렸던 어떤 보석같은 단어의 이름이 아닌가.

― 이름이 정말...... 희망이니?

― 응 희망이 할머니가 희망이 이름 지어줬대.

갑자기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꼬마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희망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희망이 내 손에 아직까지 있었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 아이를 죽일 수 없다고 깨달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그것은 이 아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으오···우오오오······.

― 아저씨 울어? 왜 울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바닥에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다.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린 뒤, 전철이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 흘리는 나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상관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떠나가 금새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를 지워 버릴 테니까.

전철은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떠나갔다. 역 안은 무덤 속 같이 조용해졌다. 쓰레기를 주워담는
청소부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어서서 꼬마의 손을 잡고 그 청소부에게 다가갔다.

 이 꼬마가 전철 안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지구대에 데려다 줄 수 있겠습니까?

청소부가 내 위 아래를 훑어봤다. 떨리는 목소리에 시체 같은 행색,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수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죠. 지구대가 이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금방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연락처와 성함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나를 수상하게 여겨서인지 청소부가 내게 이름을 물어왔다. 나는 이름을 말했다.

― 제 성은 ‘마’ 씨고 이름은 ‘지막’ 입니다. ‘마지막’ 입니다. 연락처는 이곳입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연락처를 청소부에게 적어주었다. 청소부는 연락처를 받고 꼬마의 손을 잡은 뒤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꼬마가 살짝 뒤를 돌아본 것 같았다.

청소부가 사라지자 주변엔 거짓말같이 아무도 없었다. 적막감이 나를 감싸오자 그제서야 병원 밖을 나서면서부터 이 세계에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죽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외양간에 도둑이 들어서야 울타리를 고치고, 고통의 교훈을 받아보고서야 견뎌내는 법을 배우고 , 목숨을 잃기 직전에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류에게 찬양받는 신적 존재들과 위인들도 위대한 지성의 빛을 이루기 전에 고통과 침묵의 긴 수행,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어다녀야 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귀먹음과 카노사의 굴욕, 아우구스투스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었던 위선,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일 등과 같이 인간은 절망의 깊은 바닥을 기어보고, 지옥에서 용암이 들끓는 것을 관찰해야 자신에게 부여된 무거운 운명의 이치를 깨닫고 행동한다. 지금 이 순간, 다 타들어가는 양초가 마지막 빛을 발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 인간의 모습으로. 나는 인간으로써 죽겠다.

나는 괴물이 되지 못했다. 인간의 껍질을 깨고 괴물로 향하는 최후의 한 걸음을 끝내 내디딜 수 없었다. 최후의 그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기 전, 뒤를 돌아보니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느꼈던 온기를 그 꼬마에게서, 희망에서 느꼈던 것이다.

어떤 선택을 내렸든 서서히 어둠과 망각에 묻혀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 그래도 옳은 선택이었다. 나의 선택에 후회를 남기면 안 된다. 최후의 결심을, 나의 의지와 마음을,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버렸던 희망이라는 보석을 이 세상에 남겼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 가지고 있던 진통제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들이켰다. 인간이 아닌 괴물에게만 허락된, 이 세상의 도덕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려 했던 자에게 용서란 단어는 허락되지 않는다. 고통도, 괴물도 내 손으로 없애버리자.
진통제 세 통을 입 안에 한꺼번에 털어넣었다. 아주 강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이제 곧 편해질 것이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최후의 미련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 고독하게 죽어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웃으며 죽자. 죽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있는 인간보다, 전철역의 시체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뜨겁게 흐르던 눈물이 식어가고,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출처 : 증오구역
http://joseph-fouche.blogspot.com/2009/11/blog-post_17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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