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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디자인] 길바닥 언어 수난시대

Flyturtle Studio 2015. 4. 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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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고 잘못 설치된 시각장애인 유도블록

 

 

경기 고양시의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바닥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이 심하게 파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왼쪽부터 문촌마을, 강선마을, 문촌마을 정류장.

 

시각장애인에게 유도블록은 또 다른 언어다. 바닥에 설치된 긴 막대기 모양의 선형블록은 ‘이 방향대로 진행’을 의미하고 작은 동그라미가 여러 개 돌출된 점형블록은 ‘방향이 바뀌거나 갈라짐, 또는 전방에 계단이나 횡단보도가 있음’을 뜻한다. 시각장애인은 발바닥을 밀거나 흰 지팡이 끝으로 긁어가면서 블록의 조합이 지시하는 의미를 이해한다. 일반인이 교통표지판의 맞춤법이 틀렸을 때 혼란을 겪는 것처럼 유도블록의 맞춤법이 제멋대로일 경우 시각장애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니 엉터리로 설치되거나 유지관리 소홀로 인해 유도블록이 무용지물로 되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깜깜한 고양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10여곳
파손, 방치되는 유도블록

 

20일 오전 경기 고양시 문촌마을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바닥에 설치된 400여 개의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 중 70% 이상이 깨지거나 뜯겨진 채 방치되고 있다. 블록의 돌출부분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 밋밋한 바닥이 들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촌마을뿐 아니라 서울 방향으로 주엽역 강선마을 마두역 고양경찰서 행신초등학교 행신동 정류장 등 고양시내 중앙차로 버스정류장10여 곳이 비슷한 상황이다.

 

폭 2미터에 불과한 좁은 공간, 북적이는 승객들, 양 옆으로 대형 버스가 쉴새 없이 오가는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은 일반인이 이용하기에도 위험한 구조다. 비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과 엉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차도로 밀려나가기 십상이다. 아찔한 순간이 일상처럼 스쳐가는 곳이다 보니 바닥에 유도블록이 설치돼 있다 한들 과연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을까 싶다.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은 좁은 공간에 사람도 붐비고 버스 승강 구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이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시각장애인 손지민(33)씨는 “그나마 설치된 유도블록마저 식별이 불가능할 만큼 파손되었다면 시각장애인들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시청 관계자는 “유도블록 교체 비용이 정류장 전체 개보수 예산에 포함되어 있어 당장 유도블록만 따로 교체하기 어렵다” 면서 “각 구청과 협의를 거쳐 올해 안에 순차적으로 교체를 시작하겠지만 파손된 유도블록 전체를 교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위험한 명동
2km 걸어보니
맞춤법 틀린 유도블록 투성이

 

 길거리를 걷는 일이 이렇게 위험할 수 있을까? 약 2km 거리의 서울 명동 주위를 걷는 동안 3차례나 죽을 고비를 맞았고 보도 턱에 걸려 넘어진 것도 10번이 넘는다. 각종 시설물에 의해 가로막히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떨기도 했다. 보도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을 따라 걸어 본 결과는 한 마디로 ‘위험천만’이었다. 유도블록이 아예 없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설치된 곳에서 특히 사고 위험성이 높았다. 유도블록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의 초행길을 가정해 걸으며 맞닥뜨린 당황스런 상황들을 정리했다.

 

유도블록의 연결을 끊고 있는 맨홀뚜껑과 배수구, 각종 시설물.

 

멈칫하다

 

 비가 내리던 19일 오후 서울 중앙우체국 앞을 출발해 을지로입구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이어지던 막대모양의 선형블록은 몇 걸음 못 가서 끊겼다. 10여 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맨홀 뚜껑이 유도블록의 연결을 차단하고 있었다. 발바닥과 흰 지팡이만으로 블록을 인식하는 시각장애인은 이어지던 블록이 갑자기 사라질 경우 멈칫할 수 밖에 없다. 이 날 총 19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끊어진 블록을 찾아 맨홀 뚜껑이나 배수구를 더듬었다. 맨홀 뚜껑뿐 아니라 상품 진열대가 유도블록 위 공간을 침범하거나 진행방향 앞쪽에 불법 주차된 차량 때문에 보행이 가로막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방향이 바뀌는 지점에 점형블록 대신 선형블록이 설치되어 있거나(왼쪽), 선형과 점형블록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설치된 경우(가운데)도 있었다. 점형블록이 없어 방향 전환 시점을 놓치면 그대로 직진할 수 있다.(오른쪽)

 

헤매거나 넘어지거나

 

 을지로입구역에서 외환은행 본점 쪽으로 걷다 보니 횡단보도 직전과 직후 선형블록의 방향이 두 번씩 바뀌었다. 이 곳은 방향 전환지점을 표시하는 점형블록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향을 잃고 헤맬 가능성이 크다. 자칫 원래의 방향대로 보행할 경우엔 몇 발자국 못 가 10cm가 넘는 보도 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유도블록 맞춤법 오류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사례는 이 밖에도 20곳이나 더 발견되었다.

 

 

횡단보도 직전에 설치된 선형블록이 횡단 방향을 차도 쪽으로 안내하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크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작은 부상에 그치지 않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선형블록이 횡단방향을 잘못 지시하는 경우인데, 을지로입구역 부근 건널목과 퇴계로2가 교차로 직전에 설치된 선형블록은 횡단방향을 차도 쪽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보도가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점형블록이 설치되지 않아 곧장 도로 위로 걸어갈 위험성이 높은 곳도 있었다.

 

 

공항버스 정류장이나 시티투어버스, 택시 정류장 등으로 이어지는 유도블록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대중교통은 넘지 못할 산

 걷는 동안 공항버스 3곳, 시티투어버스 2곳, 택시 정류장 1곳, 심지어 장애인노약자를 위한 무료셔틀 정류장 마저 유도 블록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지나쳤다. 유도블록이 연결된 시내버스 정류장에서도 시각장애인 혼자 버스를 이용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도움을 요청하다

 명동역 6번 출구 앞에 이르자 보도 위 유도블록이 아예 사라졌다. 이곳에서 중앙우체국 앞까지 약 400미터에 이르는 구간에서 유도블록은 건널목 표시 외에 전혀 볼 수 없었다. 결국, 유도블록을 따라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온 가상의 시각장애인은 혼자 걷기를 포기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명동역 6번 출구 앞에 설치된 유도블록(왼쪽). 이 지점부터 약 400여 미터 구간에 유도블록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오른쪽은 계단 앞 턱이 있음에도 점형블록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

 

 

http://news.nate.com/view/20150422n02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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