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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강남의 옛모습과 오늘날

Flyturtle Studio 2013. 7. 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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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nahasa1/60134626426


강남이라는 말 자체는 한강 이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서울 한강 이남의 동부 지역인 강남구와 송파구, 중앙부 지역인 서초구 등의 지역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강남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영동(永東)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좁은 의미에서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뜻하기도 하며, 여기에 강동구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보다 더 좁은 의미로는 강남구와 서초구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강남역 또는 강남역 사거리라는 말과 함께 서울의 2대 번화가중 하나인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주변에 형성된 상권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 위키백과 중에서 -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는 1963년 1월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시흥군, 고양군(각 구와 동에 따라)에 속해 있었다. 영동은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를 일컫는데 과거의 영동지역은 논과 밭 , 과수원 그리고 낮은 야산으로 이루워진 한적한 농촌모습이었다.영동지구 개발이 진행된 배경에는  강북의 인구가 600만 명은 넘어서면서 “강북의 인구집중 억제” 정책이 필요했고  또한 정치적으로 북에서 언제 대공포를 쏠지 모르는상황이었으므로 북의 대공포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는 강남지역에 개발정책을 시행하게 된것이다. 1970년 11월 영동 1지구 472만 평, 2지구 365만 평에 대한 개발계획이 발표되었고 1973년 6월에는 영동지역 약 천만 평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깡촌이었던 강남이 현 우리나라 최대의 부촌이되는 신화가 시작되었지. 


아래 영동지구 (현 강남) 옛 사진들을 구경해보자 .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눈앞에 둔 유엔군 전차부대가 

지금의 강남 신사동 일대에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미 해병대 촬영 / 유엔국참전협회제공.


강남, 송파, 잠실일대. 1960년


지금의 신사동 사거리 부근. 

1960년대 초 제3한강교가 생기기 전 나룻배로 건너다니던 시절의 모습.


개발전의 강남


개발전의 논현동. 

영동지구(강남)는 대부분이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였다.


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한남동에서 강남 신사동을 가는 가장빠른 길은 나룻배였다.

한강다리는 새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다. 1962. 8. 13. 조선일보DB


강남 신사동쪽에서 출발한 나루배가 강북 한남동 나룻터를 향하고 있고 소형 고기잡이 배와 대조적인 모습.

강건너 강변(현 산사동, 반포 일원)에는 여느 시골 모습처럼 미류나무가 늘어서 있는 모습 그대로다. 1960년대.


1969.12. 26 제3한강교 개통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나룻배가 떠나고 있다. 이 찻배 본래 목적의 용도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 사람이 조금 많이 탄것 외에는 시골에서의 그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관련자료 http://goo.gl/LiQ7u


위에서 언급했듯 60년대 지방에서는 저 나룻배는 평상시 자동차(승용차 및 트럭)를 도강하는 배다. (차량이 배에 오를때는 나룻터의 접안시설을 해놓은 곳에다 선수(앞)쪽을 대고 얖쪽 양옆의 잠금장치를 풀면 차가 오를 수 있게 되고 강을 건널때는 사공외에도 여러명이 함께 삿대와 노를 저어 건너는데 일반 나룻배보다 힘이 몇곱절은 더 들기도... ) 사람을 싣고 강을 건너는 일반 나룻배보다 상당히 큰 배인데 아마도 서을은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을 것으로 보아 어떤 날에는 큰 찻배를 이용하고 지방과 달리 모터를 장착한 배로 보인다. (그옆에 작은 나룻배도 보임) 그 이유는 선미(뒤) 한켠에 조타실이 보이며 지방에서 처럼 삿대와 노를 저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승선을 한 상태가 그 답이다.


그런데 저의 생각으론 몹시 위험해 보이는 모습인데 일반 나룻배와 달리 차량을 싣는 나룻배라 비해서 배가 넓어서 뒤집힐 염려는 없지만 차를 싣는 저 배의 특성은 뱃전이 없는게 특징이라 저렇게 많은 사람이 타기엔 위험하다는 것이다. 뱃전은 물론이고 안전난간도 없이 운행했다는 것은  당시엔 가능했지만, 현재 같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1962년 당시 서울과 한수이남(강남)을 드나들 수 있는 교량은 용산-노량진간 기차철교 외에 남서쪽의 인도교(한강대교)와 동쪽의 광나루다리(광진교) 뿐이였다.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많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였기에 왠만한 거리는 도보로 이용했고 먼곳을 돌아 영동지구에 가는것을 나룻배로 이용을 했을것이다. 


필자가 71년에 뚝섬(성수동)에서 본기억과 그 이후 영동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완공 73년) 그곳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많이 있는것을 보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때 애기를 조금만!  70년 초부터 서울생활이 시작된 나는 71년, 72년에 서울 친구들과 뚝섬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헤엄을 쳐서 서울 한강건너기를 도전했는데 71년엔 무사했고 72년 여름엔 건너편 강 언저리를 10여m를 남겨 놓았을 무렵 모터보트를 몰고온 안전요원이 죽을려고 환장했느냐 소리치고 그냥 가버렸다. 안전 요원의 경고가 있어 조금 쉬였다 다시 건너겠다는 애초의 생각을 접고 영동대교 공사현장 부근의 나룻터로 가서 뱃사공한테 자초지정을 말하고 무임 승선을하여 다시 뚝섬유원지로 향했다. 여름인데도 영동쪽엔 뚝섬쪽으로 갈려고 기다렸다가 나룻배를 탄사람이 많았는데 빌려입은 어색해 보이는 수영팬츠만 입고 있는 나를 주시하고 있어 강을 건너는 동안 얼마나 창피하던지...  (어려서 부터 고향의 남한강을 건너 다니던 실력?으로 그해 광나루에서도 헤엄쳐 도강을... 못 말리는 한가람


제3한강교 공사현장 1966년


제3강교 공사. 1969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강의(철교 외) 3번째 다리가 된 개통 직전의 제3한강교 모습. 

1969년  12월 20일. 서울시 홈피에서 발췌 


신사동과 한남동을 연결하는 제3 한강교 모습. 1969년 12월 26일. 자료:이웃블로그 축억의 편린들.


60년대 산업화·도시화를 거치면서 서울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강북도심의 팽창·과밀화로 주택이 부족해지면서 한강 남쪽으로 도시가 확대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속에는 남북이 휴전상태로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 있어 지난 한국전쟁때의 경험이 있듯 한강의 3번째 다리인 제 3 한강교 건설은 군사적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 계획대로 이때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건설(69년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70년 완공)되면서 서울은 빠른 속도로 강남으로 뻗어나가며 강남개발을 본격화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전역과 수도 서울울 잇고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핵심적 역활을 하는 그런 다리가 되었다. 


영동지구(강남) 개발은 도시분산과 국가안보가  명분

논,밭과 구릉지 일색이던 영동지구가 부상한 것은 고(故)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개발  강북에 집중된 도시기능 분산 및 국가  안보가 맞물려 이뤄졌다. 전후 폐허속에 서울로 국민의 이주가 본격화 된다. 서울시 통계연감에 따르면 62년 326만명 이였던 서울의 인구가 1966년 380만명, 1960년 478만명, 1972년 600만명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이로 인해 교통난, 주택난 등 주거환경이 악화되고 인구 분산을 위한 과제로 박정희정권은 강남개발에 눈을 돌리고 1963년 한강 이남 지역을 서울에 편입시켰다. 196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과 40세인 육사출신 김현옥씨를 발탁하고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광볻절 서울시는 지시받은지 불과6개월 남짓해 강남개발계획을 포함해 서울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계획은 워낙 급조돼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서울 개발 계획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도시계획 모형전시관 관람모습. 1969년.


서울시 홈피에는 "개발중인 강남" 이라고 되어있는데 아마도 강남대로 내지는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아닐까...


강남 신사동. 제 3한강교가 개통(1969년 12월 25일)된 이후의 모습으로 보임. 이웃블로그 '추억의 편린들'에서

왼쪽으로 뻗은 길은 1970년 7월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공사중이며, 앞쪽 6시 방향은 강남대로 공사중이다.


강남구 삼성동 일대. 1970년 모습. 


영동개발계획의 첫삽을 뜬 후 상성동에서 강남사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의 윤각은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 그 주변에는 농가와 작은 동산과 논,밭이 그대로인 모습이다. 1971년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황량한 벌판인 이 지역을 시가지로 만들기 위해 강북을 억제하고 강남개발을 촉진하는 다양한 서울시 정책이 펼쳐졌다.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공기관 이전, 명문학교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이전, 유흥업소 강남 이전시 취득세 감면,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한 압구정, 반포, 청담, 도곡동 일대 아파트 지구 신설 등이 그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 1968년 10월 15일


서울-대전간 고속도로 개통 69.12.10.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개통당시의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발동 속도전 개발


박정희 정권은 당시로서는 단군 이래 최대 토건사업으로 칭해진 경부고속도로를 준공하는 과정에서  강남개발에 가속도를 붙인다. 1968년 2월에 착공해 1970년 7월 전 구간이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재원 부족으로 정부는 적지않은 고심을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타개책으로 토지 판매를 목적으로 공사자금을 충당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법” 시행에 들어갔다. 강남지역 땅 900만 평이 대상지역으로 지정 됐다. 강남 땅값 폭등의 단초가 제공된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토지구획정리로 확보한 체비지 매각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다. 정부는 체비지를 팔기위해 다양한 유인책을 내놓았다. 1973년에는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해 강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각종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 경부고속도로 주변부터 땅값 폭등이 시작됐다. 실례로 말죽거리(양재동) 3.3㎡(평)당 땅값이 100~200원 이었으나 1년도 안 돼 2000~3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를 촉진하기 위한 드라이부도 걸렸다. 정부는 당초 도심을 관통할 지하철 2호선 노선을 당시로는 서울인구 20%도 못 미치는 강남순한선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재학생과 졸업생의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강북 도심에 있던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등 이른바 정통 명문 9개교를 1976년 부터 순차적으로 강남구와 서초구로 이전했다. 이른바 8학군이 형성된 것이다.


영동지구 개발 기공식에 참석해 착공 스위치를 누르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양택식 서울시장 1970.8.13 - 경향신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인근. 1970년대 초


농촌모습과 개발 과정이 혼재된 강남구 초기 모습.

사라진 잠실 신천 나루터와 나룻배(차배).1970년 - 조선일보


영동지구 공사현장. 1970년


오른쪽 건물이 경기고등학교


영동 신시가지 사업장 현장모습. 1970년 12월.


영동지구개발 촉진책의 하나로 논현동에 들어선 공무원아파트(앞,뒤).1971년. 

- 서울사진전 제공


공무원아파트 준공 모습(뒤편). 1971년 12월


영동지구(논현동)에 맨처음 완공된 공무원아파트. 1971년



반포아파트 와 강남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1972년 5월 25일


잠실대교 개통. 1972.년 7월 1일


잠실대교와 잠실지역 모습. 1972년


삼성동 코엑스자리, 멀리보이는 돔형 건물은 잠실 학생체육관.


잠수교 건설 착공. 1975년 9월 5일


강북사람들의 강남고속터미널 이용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착공한지 10개월만인 1976년 7월 15일 완공된 잠수교.


개발전 방배동과 반포아파트 건설 모습.

청담동 시영주택


청담동 시영주택.그 넘어에 영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영동교는 73년 11월 8일에 개통하게된다. 멀리 아차산과 용마산이..


영동신시가지에 조성된 시영주택단지.


첨담동 해청아파트.


청담교 공사. 1974년. 

한강의 청담대교가 아니고 탄천하류 올림픽대로에 있는다리.


청담교 완공단계. 

나중에 하류에 또하나의 청담교가 생겨 청담 1교라 하고 나중 것은 청담 2교로 불리게 된다.

1974년 착공, 폭 18.5m, 길이 450m로 1975년 9월 준공. 

9년 후 다리 건너에 88올림픽을 치룰 주경기장 건설이 시작됨.


청담동 일대. 1975년 1월 15일


본건물없이 승차장만으로 준공한 고속터미널. 1976년.


강남터미널 지하도 공사모습. 1978년.


잠원동 일대. 1978년


1970년대 압구정동-배, 또는 복숭아밭 뒤로 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압구정향우회제공.



거대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농부가 소로 밭갈이 하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1978년.


잠실 성내천의 옛모습 1970년대 말 - 서울역사박물관 중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주변. 1980년대 초


강남역 사거리. 1980년대 초. 뉴욕제과 건물도 보인다.


한보 주택에서 분양 예정인 대치동 은마아파트. 1982.02.10. 경향신문


대치동 은마아파트 1982년 3월


강남구 개포동. 1982년


80년대 초에 이뤄진 개포지구 개발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강남개발 방식은 끝이 났다. 이후에는 지역을 확장하지 않고 기존 서울(강남)지역을 재개발, 재건축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이와 함께 강남은 문화도시 기능을 추가하면서 주거중심 도시에서 자족적 도시로 완성됐다. 삼성동 일대에 한국종합무역센터, 공항터미널 등 업무시설이 생기고 서초동 일대에 예술의전당, 국립중앙도서관 등 문화시설이 생기면서다


송파구 오륜동. 현재 올림피파크텔과 올림픽공원이 들어선곳.


송파구 오금동.1985


서울 속의 낙도 잠실마을 딱한 사정

지금은 강남을 대표하는 곳이지만 50여년전만해도 서울의 한 모퉁이에 한강으로 둘러싸인 90여만 평의 모래밭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을 주민들은 뱃사공 또는 모래밭에 채소 농사를 지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장마철 대홍수에 농경지가 수몰되어 마을의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었습니다. 잠실은 50년 전만 하더라도 인가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의 황무지였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홍수 때면 물이 넘쳐 피해가 많았고 그때마다 모래와 흙이 밀려들어 지반이 높아지기도 했다. 해방 후 1949년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이 지역은 신천동, 잠실동으로 시에 편입되었다. 그 후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로망이 완비되었고 이 일대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 등 신시가지가 건설되기 시작, 비약적인 발돋움을 하게 된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291856262&code=860100


잠실의 어느 차가운 개울물에 빨래를 하고 있는 부녀자들1988.03. - 경향신문


88 서울올림픽이 치뤄질 경기장 건설되고 있는 탄천옆 잠실벌. 1984년 12월 21일-조선일보


88 서울올림픽 메인스타디움(잠실 종합운동장). 1988년


서울 종합운동장. 네이버 백과사전

예전의 광진교(광나루다리)와 현재의 광진교. 


옛 광진교는 일제때인 1936년에 준공한 왕복 2차선 다리인데 구조물 노후도가 심하여 철거되고, 현재의 광진교는 97년 3월 그 자리에 교각을 다시 세우고 다리(폭 20m)에 자전거 전용 도로와 돌출 전망대가 있는 2003년 11월에 개통한 새 다리이다.


강남구 삼성동. 1989년. 건축중인 그랜드인터컨티넨탈서울, 한국종합무역센터


강남과 삼성동 일대


한국종합무역센터


강남구 삼성동


삼성동 포스코사거리                                                          무역센터


강남 논현 사거리. 2009년


                        강남역 사거리                       2011년 6월 모습                        도산 사거리    

강남역 사거리

강남역 사거리. 11시 방향이 역삼동 테헤란로


강남역 사거리와 강남로.


강남역 사거리의 야경


강남대로를 축으로 하여 동서로 강남구 서초구가 나뉘여 졌다. 아파트단지 옆의 곡선로는 경부고속도로.


위의 이미지와 같은 네이버 항공뷰


강남대로 주변 모습


테헤란로 일대 (오른쪽 아래 검은부분은 선릉공원)


테헤란로 일대. 서쪽 방향을 보며.. 오른쪽 숲이 선릉공원

강남, 강북의 야경

도곡동 일대


양재동에서 도곡동 방향을 보고 촬영한 듯.. 타워팰리스 모습이 보인다.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양재동에 위치..


단지옆 양재천에서 야간에 산책겸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고 크고 작은 물고기들도 노닐고...

강남의 랜드마크로 불리우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초 호화, 초 고층아파트 

최고 69층짜리 건물 동(左)도, 옥상엔 헬기(비상시)착륙장도 있다고 하네요.

위성 검색을 해보니 광진구 자양동 건국대캠퍼스 공학관? 건물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오른쪽 아래 건국대학교 문구가보이는 건물, 일감호수, 그 앞에 자양동의 초고층 더샵스타시티 아파트 및 주변의 아파트 군, 강건너 삼성동 무역센터와 그 주변, 좌측의 도곡동 삼성타워팰리스 모습 등 강북과 강남의 어우러진 모습이 참 좋습니다. 






http://goo.gl/aSF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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