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봉창 / 박은식 / 손병희 / 전수용(전혜산) / 남자현
이봉창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사망 :1900.8.10 ~ 1932.10.10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서울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연보]
1900 :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
1918 :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기차운전견습생으로 취업.
1924 :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를 조직하여 간사로 활동.
1925 : 형 이범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됨.
1931 :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
1932 :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국왕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 투하했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 됨.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당함.
1946 : 광복 후 귀국한 백범 선생이 이봉창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
1962 :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학문을 배운뒤,
1911년(11세)에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하였다. 이봉창의 가정을 처음에는 유복했으나 13세 되던 때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이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이봉창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다가
1913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와다에이세이도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가서 17세까지 일했다.
1917년 용산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화전(和田)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해고당하였다.
1919년(19세) 8월 용산역 만선철도(滿鮮鐵道)의 기차운전견습소의 기차운전견습생(임시 인부)를 들어가 역부(驛夫)를 지냈다.
1921경 한·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4월 위의 직책에서 해고당했고,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후 동경과 대판 등지를 전전하며 가스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6년에는 병고(兵庫)에서 1년간 일본인 표구사의 보조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그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그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白貞善)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http://www.leebongchang.org/sub1.html
박은식
[이미지]
- 박은식은 중키에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항상 미소짓는 얼굴이었고, 관후하고 소탈한 성품이었다.
-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
- 개혁적 성향이 강함
- 유학에 토대를 두었지만 진보적인 성향, 유교를 바꿔야 한다는 진취적인 성격
- 책임감이 강한 인물
- 젊은모습보다 60대의 모습
- 학자, 선비 풍
- 가야계, 북방계, 소음인 => 기관지가 약한 체질, 순섭이 짧다.
[박은식]
자 : 성칠(聖七),
호 : 겸곡(謙谷), 백암(白巖), 태백광노(太白狂奴, 태백이 있는 나라의 사람으로 망국을 슬퍼하며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 무치생(無恥生, 나라를 잃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1859(철종 10)-1925.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많은 나라를 위한 논설을 쓰고,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생애]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다. 그 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박은식의 성리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 서북지방에서는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 억(南宮檍)·유근(柳瑾)·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교육 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 謙谷文稿≫와 ≪학규신론 學規新論≫를 저술하였다. (우리나라가 외국의 침략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 종교로 나라를 구하자.)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 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일본이 함부로 통제할 수 없기에 의병에 대한 기사, 반일적인 내용도 많이 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하였다.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하였다.
1906년 이후의 박은식의 애국계몽운동은 광범위한 부문에서 정력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이 시기부터는 완전히 변법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위정척사사상과 유림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권 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계몽하였다.
1906년 3월 창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 大韓自强會月報≫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였다. 기관지인 ≪서우 西友≫의 주필을 맡아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낸 ≪서우 西友≫를 모두 직접 편집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회영(李會榮)·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1908년 1월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었다. 박은식은 실질적으로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 西北學會月報≫의 주필로 적극 활동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이종호(李鍾浩)를 교장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기지의 창설을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하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서북학회 담당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支校)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사이에 63개 지교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항해 장지연·이범규(李範圭)·원영의(元泳儀)·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박은식은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서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 유교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 ≪왕양명실기 王陽明實記≫이다. (현재의 유교가 나라를 구할 수 없으므로 유교도 변해야 한다는 )
1905∼1910년 사이에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해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로 많은 논설을 썼다. 이로써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실업 구국사상·사회관습 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한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애국계몽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애국계몽운동을 의병운동과 연계지을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을 일제의 검열 하에서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고 표현했는데, 무장운동[의병운동]과 연계해 함께 나란히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박은식의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에 활동한 사상가들 중에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최고의 애국계몽사상사로 후학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박은식은 대표적으로 우리 혼을 살리고자 행동으로 보여준 자)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였다.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되어 발행과 독서가 금지되었다. 박은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한국 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한국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박은식은 마침내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서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동지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윤세복의 영향으로 대종교 신도가 되었다. 당시 저술한 책들은 ≪동명성왕실기 東明聖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 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 夢拜金太祖≫·≪명림답부전 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 泉蓋蘇文傳≫·≪대동고대사론 大東古代史論≫ 등이다.
1912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어잡지 ≪향강 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일본을 폭로, 반일을 알리는 잡지) 이 시기에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탕사오이(唐紹儀)·징메이주(景梅九)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을 통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안중근전 安重根傳≫을 저술했다. (안중근은 당시 중국인사들에게 매우 관심이 높았다.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중국에게도 유명인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안중근전기, 중국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며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 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에 간행하였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였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③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④ 자손만대에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반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한국통사≫는 간행 직후 중국·노령·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나라가 왜 빼앗겼고, 망했는지를 쓴 책, 대한제국이 망했을 때 중국에서는 타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잡지 책 저서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조국이 왜 망했는지에 대해 연구한 적이 그동안 없었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 : 1925년에 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조선반도사≫를 준비하다가 계획을 수정해 ≪조선사 朝鮮史≫ 37책을 편찬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한국 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편찬 동기를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같은 독립을 추구하는 역사서의 해독을 소멸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박은식의 ≪한국통사≫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은식은 상해에서 <이순신전 李舜臣傳>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아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 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다가, 이 신문이 얼마 뒤 정간되어 사임하였다.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신규식·유동열 등 동지들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團)]을 조직해 그 취지서를 쓰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다시 상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18년 노령 한국인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 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를 강연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발해사 渤海史≫와 ≪금사 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 李儁傳>을 저술하였다.
박은식은 1919년 3·1운동을 노령 해삼위(海蔘威)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가 6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강우규(姜宇奎)를 국내에 파견해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에 대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켰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책)
1919년 8월 상해로 가서 상해의 임시정부와 노령의 국민의회임시정부와 서울의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9월의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 때에도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뒤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해 한국근대사 체계에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역작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국 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파리강화회의.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들이 패전국들의 대한 것들을 나눠갖기 위해 열린 회의. 1919년2월8일 독립을 원하는 선언문을 만들어 영어,블란서 등 번역을 통해 각국에 보냄. 한국이 독립을 원한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은 불법이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獨立新聞≫의 간행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에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뒤이어 임시정부 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그는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수락하였다. 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결단을 내려 수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혼란시켜 온 위임통치청원과 기타 실정의 책임을 물어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뒤이어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신헌법에 의거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선출되자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박은식이 대통령을 사임하고 은퇴했을 때에는 인후염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동포들에게 독립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촉을 남기고, 장엄한 애국적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외에 ≪대동민족사 大東民族史≫·≪단조 檀祖≫가 있다.
1962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030&cid=1593&categoryId=1593
남자현
1. 영양의 독립운동가열전 책 참고
- 안동에 독립운동가의 숫자가 제일 많다. 약 350명
-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
남자현 생가과 이문열 생가가 가깝다.
2.
- 독립운동가 :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 민족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
- 독립유공자 : 독립유공자는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따라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말한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ㆍ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이다.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ㆍ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이다.
* 예우 : 법률로써 보장하는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예우로는 의전상의 예우와 보상금, 연금, 사망일시금, 생활조정수당, 교육보호, 취업보호, 의료보호, 대부, 양로보호, 양육보호, 고궁 등의 이용보호, 주택의 우선분양, 국립묘지에의 안장, 정착금 지원 등이 있다.
3.
- 1894년 첫 의병이 일어난 해, 1896년 남편 김영주가 의병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
- 자식이 20살이 됬을 때 남자현이 민족문제(나라의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으로 예상됨
- 3.1운동 전에 어떠한 연락을 받고 참가하게 된 것이 아닌가. 만주에 가게 된 것도 이미 그 전에 다 예정되어있던 것이 아닐까
-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 (백광운, 재찬)과 교류
4.
- 미신타파운동(단군죽이기 운동) : 조선총독부의 술책, 독립운동의 끈을 자르기 위함
- 닥터지바고 : 러시아 공산주의 팽창
- 러시아의 붉은군대와 백의군대가 대립하던 시절
-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에 살고있던 동포사회가 있어야 활동이 가능했다
- 3.1 해방이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짐
-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 좌, 우 독립운동 그룹이 나뉘게 됨
- 안창호가 만주에서 좌우합잡운동을 벌였지만, 일본이 중국군에게 허위신고를 꾀하여 모조리 체포됨
- 남자현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앞장서서 로비활동을 벌이게 됨
- 이들이 석방이후 남자현은 의열투쟁으로 전환하게 됨.
5.
- 테러 : 아무 관계없는 불특성 다수를 공격. 도덕성, 정당성이 없다. 911테러
- 의열투쟁 : 침략, 기구, 기관을 공격하는 하나의 전쟁행위.
'작품제작 > 미술 그림 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화] 변상벽 - 어미닭과 병아리 (0) | 2015.01.31 |
---|---|
[동양화] 꽃과 새, 동물의 상징 (0) | 2015.01.31 |
[조선초상화] 호피(虎皮.豹皮)무늬가 표현된 조선초상화 모음 (0) | 2015.01.31 |
[일본/중국 초상화] 호피(虎皮.豹皮)무늬가 표현된 일본/중국초상화 (0) | 2015.01.31 |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0) | 2015.01.30 |
[호피] 한국표범 이란? (2) | 2014.12.23 |
[호피]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 /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깔았던 호피 (0) | 2014.12.21 |
[수업내용] 전통초상화 (0) | 2014.02.10 |
2014년 - 자화상 (0) | 2014.01.07 |
[문체부] 초상화 아카데미 수강희망자 모집 공고 (0) | 2014.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