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압박에도 위엄을 자랑하던 명성황후의 접견실에는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붙인, 길이 5.6m, 폭 2.5m의 대형 표피(豹皮)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6ㆍ25전쟁 등을 거치면서 1951년 4월 이 양탄자는 한국에 파병됐던 미군 병사 휴 길트너 손에 단돈 15환(당시 25달러)에 팔려갔다. 너무 커서 개인 소장이 어렵자 길트너 씨가 모피 판매상에게 보관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양탄자가 미국 언론에 공개됐다.
그러자 한국 뉴욕총영사관은 “이 표범 양탄자는 경복궁 명성황후 궁실에서 도난당한 국보급 보물이니 신속한 반환을 요청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길트너 씨는 “서울에서 행상에게 샀다”고 주장했지만 양탄자는 곧 압수당해 한국으로 돌려 보내졌다. 이 내용은 1951년 8월 미국잡지 ‘라이프(LIFE)’에 ‘병장의 기념품’이라는 제하로 10만 달러 가치가 있는 한국 문화재에 대한 일화로 상세히 보도됐다.
그러나 반환했다고 알려진 양탄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최근 문화재 환수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 등이 지난 18일 ‘명성황후 표범가죽의 소재처 파악’을 위한 국민감사청구서를 감사원에 제출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유물은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 수장고에 있었다. 박물관은 26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문화재청에서 표피(豹皮) 유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문을 보내와 수장고를 확인한 결과 동일품일 가능성이 있는 유사 유물을 찾았다”며 양탄자를 공개했다. 둘둘 말린 채 수장고에 보관된 표범 카펫에는 ‘덕근 201’이라는 관리번호가 달려있었다. 특히 뒷면의 흰색 오얏꽃(李花) 문양은 황실용임을 뜻하는 표시로, 명성황후의 것일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박물관측은 “1969년에 덕수궁미술관이 관리하던 고종황실 유물을 이관받았는데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목록에 ‘호피(虎皮)’로 적혀있어 명성황후와 연결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는 말로 40년 이상 수장고에 묵혀둔 문화재를 두고 해외 환수운동을 펼치려 했던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해명했다.
그러나 체계적인 유물관리를 하지 못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문화재청의 책임 추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25만여점 유물의 목록화 작업도 아직 완료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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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범가죽카펫 <라이프> 지가 보도한 명성황후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표범가죽카펫.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21일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오마이뉴스 5월17일 자 보도기사: 25달러에 팔려간 명성황후 표범카펫, 행방묘연)로 알려진 대한제국기의 표피(豹皮) 유물이 명성황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기자가 활동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는 8월 5일부터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를 공개, 전시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환영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에 대한 발견과 전시 경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명성황후의 관령성을 부인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표피 유물의 오얏꽃문양이 대한제국 이전에 사용된 사례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표피' 유물에 있는 문양은 매우 정돈된 형태를 하고 있어 대한제국 성립 이후의 유물이 확실하다는 것이 자문위원들의 결론"이라면서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문제의 표범가죽깔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 길트너에 의해 25달러에 팔려 미국 콜로라도까지 갔다가 반환받은 '특이한 이력의 물건'이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이 표범가죽깔개를 10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 명성황후가 썼던 깔개라고 보도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언론에서 다루어졌다.
그런 우여곡절을 통해 반환된 문화재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60년 동안 단 한 번의 공개 없이 수장고에 방치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깔개에 대한 소재에 문제를 제기하고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접수한 후 비로소 소장 사실을 시인한 바 있다. 소장사실을 확인할 때도 마치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공개하는 듯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했다. 시민단체와 민원인들의 계속된 노력으로 명성황후 표범죽깔개의 소재가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8월 5일 역사적 유물의 공개에 앞서 충분한 자료 검토 없이 표범가죽깔개와 명성황후와의 관련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잘못을 상세히 지적하고자 한다.
호피와 표피도 구분 못하는 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5월 표범가죽깔개의 소장사실을 공개하면서, 유물번호 '덕근 201호'란 자료를 공개했다. 그런데 이 목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호피(虎皮)라고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의 깔개는 호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표피(豹皮)로 만든 것임을 상기할 때 이것이 정확한 유물목록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게 한다.
표피를 호피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호피와 표피를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 돼 버리고 만다. 또한 표범가죽깔개는 단순히 호피, 혹은 표피라고 기재할 유물이 아니다. 호피가 지시하는 대상물은 호피의 가죽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지 가공된 깔개를 지칭하는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시한 '덕근 201호'란 유물목록은 다른 유물(호피 자체를 지칭한다고 판단함)의 목록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표범가죽깔개는 유물번호조차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표범가죽깔개 근거자료 있나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 반환과 관련된 아무런 근거자료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표범가죽깔개는 1951년 길트너 병사가 불법 반출한 뒤, 미국 국무부의 '아델리아 홀' 여사의 주도로 인해 반환된 경과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 메릴랜드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된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열람하기 전에는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없는 셈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정부기관에 수차례 질의한 결과, 우리 정부는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국립중앙박물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유물의 반출경위, 반환 경위, 반환 논의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자료를 입수한 뒤 신중하게 검토해 명성황후와 표범가죽깔개의 관계를 정리해야지, 표피 문양만을 근거로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솔한 일이다.
표범가죽깔개와 관련된 미국 신문기사는 1951년 당시를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남긴 보도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주요정보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미국 기사들은 표범가죽깔개의 주인이 명성황후였다고 다루고 있다. 뉴욕주재 한국영사 데이비드 남궁은 "이 표범가죽깔개는 한국의 궁궐에 있었고,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것"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국 정부에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고 한다(<헤럴드 트리뷴><라이프> 등 보도).
남궁 영사가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 이면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확인절차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라이프>는 사진기자를 직접 서울에 보내 당시 깔개를 도난당한 장소까지 명기하고 있다. 이런 것을 참고할 때 표범가죽깔개가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은 높다. 게다가 미국에 현존하고 있는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당시 한국 측으로부터 전달받은 명성황후, 창덕궁과 연관된 메모자료, 서신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이 1951년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상반되게 표범가죽깔개와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런 자세는 당시의 한국 정부가 표범가죽깔개를 반환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오얏꽃문양'으로 명성황후와 관련성 판단은 경솔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 뒷면에 있는 오얏꽃문양은 (문양이 공식화된 1897년 대한제국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에 넣은 것"라며 "이것이 명성황후의 깔개가 아니라는 결정적 단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얏꽃문양은 황실재산을 표기하거나 황제가 사용했을 때 얼마든지 후에 부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도 밝혔다시피 대한제국 전에도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결정적 단서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라이프> 기사에는 황제가 겨울여행에 이 깔개를 사용한 적이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궁궐 밖으로 겨울 여행을 떠난 왕은 조선역사상 순종 밖에 없으므로, 순종이 겨울에 지방 순시 중 이 깔개를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 황제가 사용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든지 오얏꽃문양 장식을 깔개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표범가죽깔개는 명성황후가 남긴 유물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증언해 주는 유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경위를 조사하고 전시해야 할 유물을 방치했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커다란 과실이다. 나아가 깔개의 소재파악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음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명성황후와의 관련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9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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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명성황후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돼 지난 5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됐던 ‘표피(豹皮) 양탄자’(유물명 덕근 201)가 과학적 정밀 분석을 거친 결과 “명성황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실 리모델링 개관을 앞두고 전시 예정 유물인 표피의 유전자 종분석 등 관련 전문가들의 과학적 조사를 진행해 20일 결과를 공개했다.
박물관은 표피의 원산지 추정을 위한 표범 종 분석을 위해 채취한 시료를 국내 유명대학 및 서울대공원 동물연구실 등 전문 연구기관에 보내어 유전자 분석(DNA분석)을 의뢰한 결과, “북중국표범의 것으로 확인됐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 북중국표범은 한국에 서식했던 ‘아무르표범‘보다 색이 조금 짙고 키가 작지만 전체적인 체형은 유사한 종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명성황후의 양탄자는 48조각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표피는 실제 총 107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표피’는 6.25전쟁 시 국외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국내 반환된 이른바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와 동일품 여부로 주목을 끌었던 유물이다. 자문위원회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유물에 새겨진 이화문장(李花紋章)의 정돈된 형태로 미루어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기 이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즉 명성황후(1851~1895)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8월 5일 조선실 개관을 통해 ‘표피’를 공개할 예정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1&aid=000208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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