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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풍요 - 모든 물건들은 이곳으로 오라, 18세기 평양의 번영

Flyturtle Studio 2017. 2. 2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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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52797&cid=58463&categoryId=58463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평양의 풍요

모든 물건들은 이곳으로 오라, 18세기 평양의 번영





요약

18세기 평양은 경제적으로 번영한 도시였다. 평양은 중국 사신(使臣) 들이 들르던 곳으로, 그 덕분에 독자적인 재정을 갖출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국제관계가 안정을 찾으면서 사신을 접대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군사비가 비축되면서 평양의 재정은 풍요로워졌다. 여기에 청과의 교역이 열리고 평양은 의주대로라는 간선도로와 해로의 발전에 힘입어 전에 없는 호황을 맞게 되었다.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목차

청 사신 아극돈의 눈에 비친 평양

<평양감사향연도>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

평양의 시장과 상인




청 사신 아극돈의 눈에 비친 평양


어떤 시대의 도시가 가진 특징을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외부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평양은 조선과 중국 간 사행로의 선상에 있어서 사신(使臣)들이 머무는 주된 경유지였다. 명대 사신들이 사행차 조선에 왔을 때 평양에 머물면서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부벽루와 연광정을 비롯한 여러 명소를 둘러보았다. 청대에도 사신을 파견해 조선과의 교류를 지속했는데 조선 내부에서의 관심은 줄어들었지만 사행의 양상은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평양은 대성산과 장산에 둘러싸인 평탄한 도시다. 대동강과 보통강, 금수산 안에 세운 평양성은 내성, 외성, 북성, 중성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대해 기록한 자료들은 다수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봉사도(奉使圖)』 가 흥미로운 것은 그림을 통해 당시 조선의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봉사도』는 만주인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이 사신으로 조선에 다녀간 과정에서 지은 시와 화공이 그린 20폭 그림을 함께 엮은 책이다


아극돈의 『봉사도』 제13폭.

평양 유람을 상징하는 행위는 부벽루나 연광정에 앉아서 대동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평양의 대표적인 명소인 십리장림, 능라도, 그리고 누각이 비치는 아름다운 대동강이 한눈에 보인다.

아극돈은 1717년에 두 차례, 1722년, 1725년 네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아극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입경했고 전례에 따라 의주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가는 길에 평양에 들렀다. 중국 사신들이 평양에 오면 누각에 올라 대동강을 구경하거나 기자(箕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극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극돈은 이와 함께 이 시기 평양의 번영을 인상 깊게 본 모양이다. “옥과 금의 공납이 크게 통해 끊어지지 않으니, 평양이 가난해질까 어찌 걱정하리오”, “도성이 번성해서 예사스런 곳과 다르다”라고 하면서 “안주와 황주, 평양, 개성 등 몇몇 큰 성들은 다른 읍에 비해 번성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읍지 안에 수록된 <평양관부도> 그림

왼쪽은 1590년에 간행된 『평양지』, 오른쪽은 1730년에 간행된 『평양속지』에 수록된 것이다. 『평양지』에 비해 『평양속지』에서는 관아 건물이 한층 더 많아졌다. 또 『평양속지』에서는 18세기에 새로 나타난 북성을 볼 수 있다. 1714년에 평안감사 민진원은 모란봉에 올라가면 성안이 보이기 때문에 외적이 모란봉을 점령하면 성이 위험에 빠질까봐 새로 북성을 지었다.


<평양감사향연도>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평양은 경치가 좋고 기생으로 유명하며 돈이 넘쳐나는 풍류의 도시였다. 평양은 고조선부터 존재했던 역사 도시였고, 고려시대에는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시대 내내 사행로의 경유지로 사신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은 한양과 함께 평양에서 오래 머물면서 쉬었다.


관반사와 관찰사는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대동강 뱃놀이를 준비하고 부벽루나 연광정에서 잔치를 열었다. 여기에는 교방의 기생들도 동원되었다. 이 시기 화려하고 풍요로운 평양의 이미지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양감사향연도>에 잘 나타나 있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

평안감사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잔치를 연 모습을 그렸다.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대동강 뱃놀이는 화려한 풍류가 최고에 달한 광경이라고 할 만하다. 이 큰 폭의 그림에는 당시 평양 사람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

부벽루에서 벌어진 잔치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부벽루 왼쪽에 있는 봉우리가 모란봉이다. 모란봉 뒤로 성벽이 둘러 있다. 부벽루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영명사이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연광정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평양감사향연도」는 3폭이 남아있지만, 미국 피바디 에세스 박물관에는 8폭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원래는 다른 그림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에는 화려한 연회와 수많은 군중 이외에 평양의 민가가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18세기 시인 신광수가 쓴 <관서악부>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는 평안감사가 부임하면서 보게 되는 평양의 광경을 묘사했는데, 실제 상황을 보고 쓴 시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시 속 평양의 모습이 상상으로 그려낸 비현실적인 광경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관서악부』

1774년 신광수가 지은 108수의 연작시 <관서악부>는 평안감사로 간 채제공에게 준 시이다. 이 시에는 평안감사의 부임한 뒤 맞이하는 행사에서 평양의 역사와 문화, 풍속, 명소에 이르기까지 평양의 다채로운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하고 감사를 위한 잔치에 나오는 기생들은 한결같이 화려한 치장을 한 모습이다. 연경 비단옷을 입고 고급 담배인 삼등초를 피우며 비녀와 장신구로 한껏 멋을 부렸다. 그래도 가장 화려한 모습은 잔치가 열리는 대동강의 밤 풍경일 것이다. 108수로 이루어진 <관서악부>의 제47수에서 바로 이 장면을 다루고 있는데, 이를 보면 <평양감사향연도>의 ‘월야선유’처럼 낮처럼 환한 야경이 얼마나 화려하고 성대할 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관서악부> 제 47수

달 밝은 밤 풍악 울리는 연광정의 잔치엔

붉은 사롱 등불을 서까래마다 달았네.

맑은 강을 두루 비춰 대낮처럼 밝으니

천장에 금빛 강 물결이 비쳐 일렁이누나.

笙歌明月練光筵 紅燭紗籠掛百椽

遍照澄江如白日 金波藻井蕩相連


겸재 정선, 「연광정도」

중앙의 연광정의 기준으로 아래에 있는 건물이 대동문이다. 그 위에는 모란봉이 있다. 대동강 너머에는 십리장림이 있고 능라도의 일부도 보인다. 위의 글씨는 ‘해동제일승 제일필(海東第一勝 第一筆)’이다. 연광정에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최고의 승경을 최고의 화가인 정선이 그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


「용만승유첩」 제1폭 「통군정아회도」

1723년 3월 조태억이 청나라 사신 액진명 등의 원접사로 차출되어 의주에 가서 통군정과 압록강 주변 승경을 유람하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통군정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뒤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의주부 내 중국사신을 위한 관사인 용만관도 나타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잔치를 열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평양이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양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는 감영이 위치한 평안도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평안감사는 평안도의 군사와 재정을 관할했기 때문에 평양은 평안도의 물산이 모여드는 집산지였다. 평양이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고,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을 배웅하는 길목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정에서 접반사를 보내어 한양까지 안내도록 했다. 이들이 일반적으로 이용하던 사행로는 의주에서 평안도를 관통해 한양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였으므로 사신이 오면 평안감사도 동행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평안감사가 있는 평양이었으므로 이곳에는 평안도의 물력(物力)이 총동원되었다.


이렇게 사신을 접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평안도는 각종 세금 부담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평안도가 늘 부유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이후까지 청의 사신은 조선에 자주 왔고 조선에서 청에 파견하는 사신도 많아졌다. 평안도는 이들을 대접하고 예물을 안겨주느라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또한 평안도는 토지가 척박해 농사에 적합한 땅이 적었고, 18세기까지 평안도 강변 7읍에서 화폐를 사용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허락 없이 함경도와 평안도를 오갈 수도 없어서 상인의 활동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점차 청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군사비를 마련해두는 차원에서 곡식과 돈을 쌓아두었으나 전쟁의 위협이 줄어들면서 군비는 그대로 평안도 재정으로 흡수되었다. 마찬가지로 사신의 파견이 줄어들게 되면서 사신 대접을 위한 비용이 절감되자, 평안도도 과중한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평양감영에서 축적된 자본은 상인의 자본으로 이용되었다. 1784년 평안감사를 역임했던 이성원(李性源)이 관서지방에서 금을 캔다고 아뢰었던 것처럼 중앙정부에 보고되지 않는 광산 수입도 있었다. 관서지방은 가장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관서총도(關西摠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초산(楚山)’과 ‘안북(安北)’이라는 군현의 명칭으로 볼 때 지도의 제작 연대는 1786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굵게 표시된 선이 의주에서 한양을 잇는 조선의 가장 큰 교통로인 ‘의주대로’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은 일본과 명을 잇는 중계무역을 했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청의 요구로 교역이 합법화되자 이에 따라 평안도의 상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에 시작된 책문무역으로 역이 크게 증가했고 평안도 지역민이 참여할 여지가 많아졌다. 아극돈이 『봉사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양은 안주와 황주, 개성과 함께 번성한 지역이었는데 모두 서로(西路)라고도 불린 서울-의주대로 선상에 있었다. 이 도로는 중국에서 서울, 다시 동래로 이어지는 조선의 간선 도로이자 동시에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도로였다.

18세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는 앉아서 재화를 움직여 남쪽으로는 일본과 통하며 북쪽으로는 연경1)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끌어들여 더러는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그 다음은 평양과 안주다”라고 할 정도였다.


『택리지』

1751년(영조 27)에 이중환이 직접 답사하여 저술한 우리나라 지리서이다. 「팔도총론」에서 각 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평안도의 경우 각 지역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중환은 “온 나라 장사꾼이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고 다니나 목적지가 멀면 비용이 많이 들어 이익이 적다. 그러므로 배에 물자를 실어 교역하는 이익이 더 많다”고 했다. 이 말은 평안도에도 해당되었다. 경강에서 평안도로 가는 뱃길에는 장산곶(長山串)이라는 물살이 센 지역이 있어서 자유롭게 항해할 수 없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해상운송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조선 기술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18세기 후반에는 장산곶을 경유하여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1782년(정조 6)에는 흉년으로 서울 지역의 쌀값이 폭등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안도에 보관하던 관서미 3만 석을 서울로 옮기도록 했는데, 이때 대형선박인 경강대선으로 관서미를 운반했다. 그동안 장산곶 같은 급류지역으로 평안도는 폐쇄된 지역이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장산곶이 뚫리면서 해상 교통은 삼남(三南)과도 이어졌다. 이제 상인들의 활동영역도 넓어진 것이다.


『해동지도』 중 「황해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장산곶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에서 황해로 돌출한 곶이다. 장산곶 앞바다는 해류의 소용돌이가 심하여 항해가 어려운 곳이고 해난사고가 잦았다. 때문에 16세기까지도 장산곶을 통과하는 해상 운반이 금지되었으므로 평안도는 해상로를 이용하여 서울 및 남부지역과 상거래를 할 수 없었다.



평양의 시장과 상인


18, 19세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는 전국 각지의 시장을 간략하게 제시한 바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평양에는 관전장(館前場)을 비롯해 10개 시장이 있었다. 평양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시장의 수도 많고 다루는 품목도 많았다. 그러나 평양의 시장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1905년에 간행된 『평양지』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장시(場市)’ 항목이 생겨났다. 여기에서도 평양은 관서지방의 큰 도시이고 북으로는 연경, 남쪽으로는 동래로 이어져 여러 재화들이 모여드는 ‘옛날의 페르시아(古之波斯)’ 같은 곳이며 길가에 연이어 있는 점포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고 설명했다.



『평양지』 제 1장(우) / 제 2장(좌)

1905년에 평양군수 이승재가 주도해서 펴낸 『평양지』이다. 평양읍지는 윤두수가 1590년에 『평양지』를 간행한 이래 『평양지』의 기본 체제 위에 시대적 변화를 추가하는 형태로 부단히 간행되었다. 이 『평양지』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평양의 시장에서 판매하던 물품들을 제시한 ‘장시’ 항목을 신설하였다.


평양은 버드나무 많은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유경(柳京)’이라고 했고, 평양 상인도 ‘유상(柳商)’이라고 했지만 그 구체적인 활동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여러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733년에 영유현(永柔縣)에서 근무한 윤득화(尹得和)가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관서지방은 농사하기 적합한 땅이 아니라서 백성들이 농사를 버리고 장사에 쏠려 따라가는 사람들이 열에 여덟이라고 했고, 1739년에는 조현명(趙顯命)이 근래 인삼이 부족한 이유가 관서지방과 개성의 잠상(潛商, 밀무역하는 상인) 때문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18세기 말의 대표적인 상품 작물인 담배는 평안도 성천에서 대량으로 재배되어 서울로 유통되었다. 놋그릇의 제조와 판매도 성행했다. 평안도 청정의 납청정에서 생산된 놋그릇은 박천 진두장(津頭場)을 거쳐 배편이나 육로를 통해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방 일대로 상권을 넓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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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평양시장. 평양시장은 대구시장, 강경시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평양 상인에 대한 공식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평양 상인에 대한 야담(野談)이 남아 있어 당시 사람들이 평양 상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야담 속에서 평양상인은 중국 무역상으로 주로 나타난다.


조선후기 야담집 『청구야담』에는 정(鄭)씨 성을 가진 상인이 평안감영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빌려 인삼과 모피를 사서 중국 남경에 팔러갔다가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른 야담집에는 중국과 무역해서 부유한 상인이 된 전장복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우연히 서해바다 가도에서 풍랑으로 배가 침몰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남경 상인 상리병의 사연을 듣고 장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목돈을 빌려준다. 이후에 상리병은 크게 성공해서 은혜를 갚는다.


흥미롭게도 두 야담에서 평양 상인과 중국 상인은 서로에 대해 강한 신뢰를 보여준다. 사람들에게서 돈을 빌려 물건을 산 정씨 상인이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절친한 북경 상인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장사하러 왔다가 타국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경 상인은 생판 모르는 평양상인의 도움을 받았다. 상리병은 집으로 돌아갈 노잣돈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전장복은 장사하는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면서 장사할 밑천을 대주었다. 상인으로서의 유대감이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모습을 보면, 평양상인이야말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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