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모든 사회계층,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신뢰와 위신을 얻었다. 1차대전을 패망한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경제난으로 나라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독일국민들은 더이상 희망이 없었다.
이때, 히틀러가 등장한다.
히틀러의 나치는 모두에게 ‘일자리와 빵’을 약속했다. 독일의 국민총생산은 1932년 5백80억 마르크였다. 불과 5년뒤인 1937년 9백30억 마르크로 증가함으로써, 그해에 ‘황금의 20년대’의 최고치인 1929년의 8백90억 마르크를 앞질렀다.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얻기 시작했고 소득을 갖게되었으며 증가하는 소비재 공급을 향유할수 있게 되었다. 암울했던 독일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의 3년동안, 국민총소득은 230억 마르크에서 110억 마르크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1932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78 마르크에서 627 마르크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취임했을 때 독일 국민의 90%가 빈민층이었다. - Leon Degrelle 장군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당시 독일상황
*대량실업 상태
*산업의 침체
*많은 손실을 입히는 노조의 파업행동
*민간 투자가 1/6로 감소
*농산물 가격의 붕괴
*도산한 회사들의 수가 증가함
*총 소득이 절반으로 감소
*독일국민의 90%가 처참할 정도의 상황에 처함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광물자원이 풍부한 땅을 몰수당하고, 50년이 걸려도 지불 할 수 없을만큼 증가하는 채무상환을 강요당함.
*소련의 자금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빈번한 파업행동이 무산되었지만 격렬한 쿠데타를 일으킴
말그대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당시 독일은 가장 어두운 미래를 가진 국가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지 5년후
*종이 제조 50% 증가
*디젤유 제조 66% 증가
*석탄 생산량 68% 증가
*연료용 유류 생산량 80% 증가
*광유(석유) 생산량 90% 증가
*인조견사 생산량 100% 증가
*등유 생산량 110% 증가
*철강 생산량 167% 증가
*윤활유 생산량 190% 증가
*국민총생산 400억마르크 증가
독일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아돌프에 의해서 크게 향상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공장과 농장을 순회했고, 그들의 여론을 직접 듣기 위해서 노동자들 및 서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런 경호원도 없이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럼에도 예기치 않은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그를 우상처럼 받들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첫해 말에는 실업자들의 수가 6백만 명에서 3백 37만 4천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나머지 전 세계가 심한 경제적인 침체기인 경제 대공황을 겪는 동안에, 독일은 전례없는 2백 62만 7천 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 되었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하여 산업을 부활시키는 것에 기초를 둔 것이다. 10억을 투자한 것은 이후에 세금수입으로 손쉽게 국가로 회수될 것이었다. 독일은 곧 그 결과를 보게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반대는 경제적 기적 앞에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또는 아우토반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들이 착수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가정용 차량인 폭스바겐 또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혁신되었다.
"독일경제의 구제는 오직 독일국민의 노력과 그들이 습득한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해외의 국가들이 여기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황금과 외국자본 없이도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금에 짓눌려있는 일부 다른나라들이 그들의 통화가치를 저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반면, 독일 마르크화의 배경에는 독일의 노동력이 버티고 서 있었다. 1938년 5월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지금 수백만명의 실업상태가 야기하고 있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에서 우리는 노동인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 때문에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다." - Adolf Hitler
American Manifest Destiny
"이런 재정적이고 산업적인 놀라움은 외국채 없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기적에 관해서, 처칠은 찬사를 했다: "이러한 공적에 대해서 어떤 이외의 것이 고려되어질지 몰라도, 그것(공적)들은 확실히 전세계의 역사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다." - American Manifest Destiny(미국인들의 명백한 운명) Conrad Grieb(작가 이름). Examiner Books. N.Y.(출판사 이름)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은 부류를 사회혼란의 근원, 살 가치가 없는 생물로 지정하고 말살을 추진했다.
*동성애자
*강력 범죄자
*정신질환자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에 찌든 유대인
*집시
*여호와의 증인
나치당이 집권하자 독일 전역에서 동성애자가 색출되어 2만명 가량이 처형됬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또한 그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의 98%는 공산주의자들이였다. 또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그리고 또한 홀로코스트는 날조선동주작이자 유대인학살이란 없었다.
*출처자료 링크목록*
1편 www.bitchute.com/video/Wsl1H20BMlmK/
2편 www.bitchute.com/video/BbsTUwaPNMzY/
3편 www.bitchute.com/video/mxIHab5eu27z/
4편 www.bitchute.com/video/MgLUakKfS3Qe/
5편 www.bitchute.com/video/Bc4yXiFSmjiG/
6편 www.bitchute.com/video/p3UrAuAs2Awv/
그리고 또한 히틀러는 조선에 수해복구비용을 지원해주었다. 이 당시 조선은 일본이 고종과 양반들에게 벗어나게해주고 근대화시켜주고 발전시켜주며 일본에 흡수되었던 상태였는데 당시 독일과 일본은 동맹이라서 도와준 것이 아니다. 독일과 일본의 동맹은 1940년이다. 저당시 독일은 오히려 중국과 동맹이었다. 나치 독일이 1936년 전국적인 물난리로 피해를 입은 조선에 피해복구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중국 대련 주재 나치독일 영사가 직접 조선총독부에 수해 복구비를 주었다.
히틀러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히틀러는 독일에있는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수있는 서약서를 유태인과 작성하고 독일내 유태인들은 본인의 사유제산을 온전히 들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번성시켰다. 수용소에 있는 유태인은 유태인 공산주의자이다. 유태인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을 격리시킨것이었다.
히틀러의 나치가 인종주의적이였다는것은 오로지 유대인에 한해서지 슬라브족도 경멸했지만 공산주의에 한해서였다.
히틀러의 나치가 동유럽을 점령해 나갈때 동유럽인들은 나치를 열렬히 환영했고 이 동유럽애들이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 박멸시켰다. 심지어 소수민족의 자치권까지 보장해줬다.
히틀러가 영미식 사관에 의하면 엄청난 인종주의자 였다고 하는데 정작 당시 올림픽떄 금메달딴 미국인 흑인 선수는 올림픽 때문에 독일에 머무를 당시 자신을 차별하는 태도를 느낄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버스조차 타지를 못하던 시대적 상황이였고 가게가 있는 거리를 지날때도 그 흑인 선수를 놀리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메달을 수여받을때도 히틀러가 경의를 표하고 악수도 해줬다고 자서전에서 나온다. 반면 미국의 유대계 언론은 이 선수가 히틀러에게 외면받았다고 보도했었다. 이 흑인 선수는 금메달 따고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환대도 없었고 말(동물)이랑 경주나 시키는 광대로 전락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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