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노컷뉴스 김지수 기자] 남존여비(男尊女卑)라 했던가.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여존남비' 사회다. 갈수록 남자들이 설 곳을 잃고 있어서다.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 중장년은 직장과 가정에서 치이고 밀리기 일쑤다. 하지만 본인도, 주변도 여전히 인식은 조선 시대에 멈춰있어 갈등도 만만찮다. CBS노컷뉴스는 '男子수난시대'의 세대별 실상을 5회에 걸쳐 집중 조망한다. [편집자 주]
[男子수난시대]
①20대 '답'이 없다
②30대 '집'이 없다
③40대 '나'는 없다
④50대 '일'이 없다
⑤60대 '낙'이 없다
①20대 '답'이 없다
http://news.nate.com/view/20130909n02392
“군대 다녀왔으니 이제 진짜 남자네.”
김모(22) 씨가 전역한 뒤 주변으로부터 들은 첫마디였다. 전역을 축하하며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김 씨에게 다가오는 부담감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전역했으니 부모님 속 덜 썩이고 철 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야 했죠. 하지만 군대 다녀왔다고 해서 갑자기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대학에 갓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군대를 다녀오면 곧바로 취업 준비에 직면하게 되는 게 바로 20대 남자들이다.
갈수록 버티기 어려운 시대상을 빗댄 '88 세대'니, '삼포 세대'니 하는 말들도 남자라서 더 와닿는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인생의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리 탈출구도 해답도 보이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다.
주변에서는 병역을 마치면 ‘남자 어른’이 되는 관문을 뚫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얼른 사회인으로 자립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기껏 '알바'를 구해봐야 최저임금인 시급 5천원 수준이지만, 이제 성인이다 보니 할 것도 많다. 술은 술대로, 당구는 당구대로, 클럽은 클럽대로, 그러면서도 각종 학원은 학원대로 섭렵해야 하니 등골이 휜다.
그나마 남자들의 세계엔 비용 분담에 '룰'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경제력은 거의 '제로'인데, 연애라도 할라치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용 부담을 도맡는다.
류모(20) 씨는 “아무래도 남자가 밥도 사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아르바이트로 데이트 비용을 대기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서울 시내 주요 '맛집'의 카드 결제성향을 분석해보면, 남성의 결제비율이 여성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데이트 명소로 꼽히는 지역에서는 메뉴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결제비율이 압도적이다.
비단 만남에서뿐이랴. 전모(25) 씨는 "밤마다 여자친구와 통화할 때도 남자가 걸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2년간 통화비를 부담하느라 휴대전화 통신사 VIP 고객이 됐다”고 털어놨다.
한 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 남자 대학생들의 23%는 연애의 가장 큰 걸림돌로 '데이트 비용'을 꼽았다.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데이트 비용 분담은 '5.7:4.3'이지만, 실제로는 '6.5:3.5'를 분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반이다. '10:0'인 경우도 적지 않을 거라는 게 20대 남성들의 '공분'이다. 오죽하면 "더치페이(각자내기)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까지 회자될 정도다.
20대 남성들의 '수난'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남자'란 이유만으로 사회 통념상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아직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구태가 "남자 아이가"로 포장돼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데다, 남성들 스스로도 '근육' 중심의 근거 없는 우월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강모(25) 씨가 다니는 회사에는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인사가 있다. 바로 '비비크림 남'이다. 누가 봐도 '패셔너블한' 그 남자 직원은 매일 출근하면 정성스레 비비크림을 바른다.
소문은 회사 내에 조용히, 그러나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본인만 모를 뿐 '비비크림 남'이라고 하면 "아~OO 씨!"로 통하게 된 것.
남성용 비비크림도 따로 출시되는 시대, 남자라고 외모를 가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초식남’, ‘그루밍족’처럼 전통적 이미지와는 차별화된 남자들이 주목받는 시대다.
남성적인 레저 스포츠나 술집을 선호하는 게 전통적인 '육식남'이라면, 문화생활과 카페를 선호하는 게 '초식남'이다.
전통적인 남성의 이미지가 '털털함'이었다면, 이제는 여자보다 더 잘 꾸며 입고 다니는 '그루밍족'이 각광받는 것이다.
패션과 자기 관리에 관심이 많은 김모(25) 씨도 종종 화장품 쇼핑을 간다. "군대에 있을 때 오히려 바깥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에 막사에 비치된 패션잡지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는 그는 "전역 후 유행에 뒤쳐지지 않게 옷을 입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전국 남자 대학생 75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84%는 "상황에 따라 화장을 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개수도 평균 1.8개였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고유 영역은 나날이 허물어지고 있지만,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조선 시대와의 '과도기'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따라가고는 있지만, 가끔은 의문이 들죠. 남자라고 해서 꼭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요.”
한 대학생의 말처럼, 대한민국 20대 남자들은 오늘도 '소년'과 '어른' 사이에서 주변이 요구하는 '남자'까지 거머쥐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②30대 '집'이 없다
http://news.nate.com/view/20130910n02567
서울에 있는 한 공기업에 다니는 이수현(32·가명) 씨. 남들은 '신의 직장'에 다닌다며 부러운 시선을 듬뿍 보내지만, 정작 이 씨는 요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에다 잦은 출장 탓에 가족과 함께 한 식사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3년차 사원이지만 후임이 없어 아직까지도 말단인 이 씨. 팀 내 굵직한 업무부터 복사 심부름, 민원 처리 등 잡다한 일까지 도맡아하기 일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현 씨에게 스트레스를 준 건 바로 '이별'이다.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도 정신적 쉼터가 되어줬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최근이다.
일이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해 멀어진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결혼' 문제였다.
이 씨보다 연상이던 여자 친구는 결혼을 원했지만, 수현 씨는 그녀를 밀어냈다.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씨는 "공기업이지만 연차가 낮아 연봉도 적은 데다, 월급을 받아도 학자금 대출이나 각종 생활비로 지출하다보니 모아둔 돈도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가장 큰 문제는 '집'이었다. "결혼하려면 남자가 집을 마련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런 형편이 전혀 안 된다"며, 수현 씨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결혼을 포기하고 마는 30대 남성은 비단 수현 씨뿐이 아니다. 일자리도 불안한 데다 무엇보다 '내 집 마련'이 어렵다보니, 결혼하고 싶어도 엄두를 못 내는 것.
"아직 사회 곳곳에서 남녀차별이 심하다고 하지만, 결혼 준비에서만큼은 남성이 '절대 을'(乙)"이란 게 30대 남성들의 한목소리다.
사실 수현 씨의 여자친구가 집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인 이 씨는 늘 그런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자들의 관심은 재산이나 집에 있다"고 느끼는 수현 씨에겐 소개팅도 부담스럽다.
이 씨는 "요즘 여성들의 눈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에 단순히 직장만 있는 것으론 안 된다"며 "집은 있는지, 재산은 얼마나 있는지 등 여러 조건들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수현 씨가 생각하는 남성의 결혼 조건은 "방 두 개 딸린 아파트 전세쯤은 구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다.
이 씨는 "보통 여성들 대부분이 강남에 살고 싶어하지 않느냐"며 "강남이 아니라 서울 시내 전세라도 구하려면 최소 1억 5000만 원에서 2억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지금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사리 마련한 중형차도 결혼 자금을 모으기 위해 되팔까 생각해본 수현 씨. 하지만 차도 없이 소개팅에 나갔다간 되려 위축될까봐, 비싼 기름에 보험비까지 꾸역꾸역 내가며 처분도 못하고 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만, 부모님 또한 여유가 있는 게 아니어서 일찌감치 생각을 접었다.
이 씨는 "부모님이 지원하지 않으면 결혼 자체가 힘든, 가정을 꾸리기 힘든 상황인 것 같다"며 "여자가 집 사고 남자가 혼수 마련하면 안 되느냐"고 진담 섞인 농담을 던졌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미혼 남성은 계속 늘고 있다. 서울시의 ‘통계로 본 서울 남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990년 11만 3499명이던 30~49세 미혼 남성은 20년이 지난 2010년 49만 6344명으로 4.4배나 급증했다.
이 가운데 특히 35세 이상 남성의 미혼 증가율은 같은 기간 2만 4239명에서 24만 2590명으로 폭증했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노총각' 비율이 20년 전보다 10배나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추이에는 결혼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작용했겠지만,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큰 원인이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2년 전국 결혼 및 출산동향조사'와 '전국 출산력 및 가족 보건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성의 40.4%와 미혼 여성의 19.4%는 "경제적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낮은 소득과 불안한 직장, 과도한 주거·결혼 비용 등이 결혼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보다 두 배가량 많은 남성이 '경제적 이유'를 꼽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결혼비용 가운데 가장 부담스러운 항목으로는 역시 남성의 81.8%가 '신혼주택 비용'을 꼽았다. 반면 여성들은 44.8%가 '신혼살림'을 지목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커지고 있다지만, '집'은 여전히 남성의 몫이란 얘기다. 30대 남성들이 "결혼 준비만큼은 절대적인 을"이라고 읍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③40대 '나'는 없다
http://news.nate.com/view/20130911n03042
불혹(不惑)의 나이, 40대. 공자가 ‘확고한 나의 길이 정해져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맹자는 자신의 40대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란 뜻의 부동심(不動心)으로 칭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40대를 '진정한 남자가 되는 시기'라고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40대 남성은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단단하고 안정적일 것만 같지만 대한민국의 그들은 사실 이런 별칭들과는 동떨어져 있다.
CBS 취재진이 만난 '대한민국 보통 40대'들은 압박과 스트레스, 소외감에 흔들리며 불혹(不惑)보다는 불안(不安)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
◈"나이 50까지 이 회사 다닐 수 있을까요?"
가장 큰 불안감은 역시 생존에 대한 불안감.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퇴직연령은 53세이지만, '체감 퇴직 연령'은 40대 중후반이라는 게 공통적인 목소리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났다 해도 가정의 생계를 떠맡은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은 40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퇴직과 그 이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회사원 최모(44) 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계 제약회사에 다니다 6년 전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원하던 회사로의 이직에 성공했던 당시만 해도 남들이 안 하는 일에도 뛰어들면서 의욕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40대가 되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힘이 빠지더라"는 게 최 씨의 얘기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는 '사람을 잘 안 자르는 회사'로 유명했지만, 그런 분위기도 최근 많이 바뀌고 있다며 착잡함을 내비쳤다.
최 씨는 "작년에 한번 부장급 7~8명이 한꺼번에 나갔는데, 한평생 일한 회사를 그렇게 나가는 걸 보면서 좋아보이진 않았다"며 "향후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난 50까진 버티고 있을까' 싶어 고민이 많아졌다”고 털어놨다.
"보통 차장 정도까지 남아있고, 부장 제대로 못 달면 글쎄, 얼마나 버틸까요?". 최 씨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10년을 일했는데…왜 아직도 쪼들릴까요?"
팔팔하던 30대 시절 대부분을 '일'에 바친 40대 남자들. 하지만 그토록 일했는데도 손에 쥔 건 별로 없다 보니 답답한 상황에 봉착하기 일쑤다.
그 중에서도 '대출금' 문제는 40대의 발목을 붙잡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부동산 경기가 좀체 떠오를 기미가 안 보이면서 대부분의 40대는 대출금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이다.
40대 회사원 손모(41) 씨도 그렇다. 손 씨는 직장생활 10년차의 ‘베테랑 영업사원’으로, 회사 안팎에서 인정받으며 남들이 보기엔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불안하다고 느낀다. 손 씨는 "자녀 둘 교육비 문제부터 대출까지 있는데, 그 대출에 대한 이자 부담에 어머니도 모셔야 하고, 말도 말아요"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손 씨는 "한 달에 사교육비로 50만 원은 고정적으로 나가고 거기에 1억 넘는 대출 이자로도 매월 50만원씩은 나간다"며 "월급의 4분의 1이 그냥 나가는 돈이니 이것저것 내다보면 저절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자녀 둘을 각각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보내고 있는 황모(41) 씨도 마찬가지다. 사교육비 부담은 자녀의 연령을 가리지 않고 닥쳐온다.
"오히려 결혼하기 전에 돈을 좀 모으고 저축적금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저축은 오히려 못 하는 상황"이라고 답답한 기색을 내비쳤다.
황 씨는 생활비에 교육비, 대출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빠져나가는 돈을 보면 허무해진다고 털어놨다.
"10년 전하고 똑같은 거 같아요. 경제적 여유는, '10년 넘게 일했는데 왜 모은 게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사교육비 부담을 가장 크게 짊어지고 있는 세대가 바로 40대다.
현대경제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국내 가구의 교육비 지출 구조 분석' 자료를 보면, 평균보다 많은 교육비 지출로 빈곤하게 사는 '교육빈곤층'의 대다수는 40대다.
자녀교육비 지출이 있는 가구 중 세대주가 40대인 경우는 333.3만 가구로, 전체의 52.7%에 달한다. 그렇잖아도 각종 지출이 많은 40대가 자녀 교육비도 줄이지 못해 경제적으로도 취약한 모습을 띠고 있는 셈이다.
맞벌이를 하든 하지 않든, 대한민국 40대 남성들은 '절대적인 수입'을 어떻게든 창출해내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감을 묵묵히 감당해낼 수밖에 없다.
◈"사춘기 자녀와 대화는 힘들어…'왕따' 기분이 이런 걸까요"
40대가 이런 '경제적 압박'을 이겨내려면 회사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가정 일엔 소홀해지는 게 당연해진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지만, 그 가족에게선 또 외면당하는 악순환의 고리도 이 대목에서 생긴다.
'가정적인 아버지'가 인기를 끌고 남편의 가사분담이 당연시되는 사회풍조가 퍼지면서, 이런 기대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40대 남성은 가정에서조차 소외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특히 자녀들이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없던 대화가 더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얼굴 볼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어머니는 편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김모(47) 씨는 자신을 ‘왕따’라고 표현한다.
"딸내미는 엄마하곤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요샌 나를 어려워하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한다"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돌입하기 전에는 곧잘 대화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머리 좀 컸다'고 부모들과 대화도 잘 안 하려 하는 데다, 자주 얼굴을 못 보니 자녀들의 관심사가 뭔지도 도통 파악이 안 된다는 것.
행여 아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져도 "공부 잘 되냐", "학교 생활은 어떠냐" 류의 '하나마나한 말' 밖에 안 튀어나온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아이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아내와도 예전 같지 않다. 자신은 누구인지, 또 여기는 어디인지, 가정에선 어떤 위치인지 되돌아보지만 이미 거울에 비친 구레나룻은 희끗희끗해졌다.
김 씨는 "애들한테 말 붙이기도 어렵고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핀잔을 준다"며 "직장은 직장대로, 집은 집대로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토로했다.
④50대 '일'이 없다
http://news.nate.com/view/20130913n02664
산을 찾는 50대 남성이 늘고 있다. 산악회에 가입해 여럿이 뭉쳐가는 것도 아니다. 취미생활로 화려한 등산 장비를 갖춰 입는 건 더더욱 아니다.
평일 아침 관악산에서 만난 이모(52) 씨. 그는 누구에게도 인사 한 번 건네지 않고 묵묵히 산에 오른다.
낡은 운동화에 빛바랜 등산복, 푹 눌러쓴 모자만 챙겨온 남자의 어깨에는 막걸리 한 병과 고추장에 찍어 먹을 마른 멸치만 담긴 가방이 걸려있다.
이 씨와 같은 50대 남성들이 굳이 산을 찾는 이유는 우선 건강 때문이다. 한창 시절 매일같이 새벽에 출근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필름 끊기는' 회식을 했다. 또래 중에 당뇨와 고혈압 걱정 없는 친구가 없다.
하지만 건강보다도 더 큰 이유는 '갈 곳이 없어서'다. 도봉산에서 만난 은행원 출신 김모(58) 씨는 스스로를 '뱅커'라고 소개하면서 "할 일이 없어서 산에 왔다"고 했다.
"은퇴하니까 시간은 남는데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도시에서 돌아다니면 다 돈이 들고, 딱히 소일거리 할 게 없다"던 김 씨는 취미를 묻자 한참을 망설였다.
"취미라니,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골프야 일 때문에 접대하느라 배운 거고, 일 그만둔 처지에 칠 형편도 안 되고…".
잠시뒤 김 씨는 '정답'을 찾아낸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세대에게 취미가 어디 있나. 기껏해야 등산하고 아침에 뛰는 거지".
그나마 김 씨는 일이 없어도 당분간 버틸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나은 편이다. 기획재정부 통계에 따르면 50대에 취업한 사람은 지난 2003년 31만여 명. 하지만 지난해엔 5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50대의 고용인구와 고용률 모두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문제는 일자리의 '질'이다. 도봉산에서 만난 정모(55) 씨는 3년 전부터 아파트 경비 일을 하고 있다. 24시간 격일 근무라 쉬는 날이면 산에 온다고 한다.
생선가게를 꾸렸던 정 씨는 "새벽 3시 30분에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받아오면 물건이 다 팔릴 때까지 밤 12시가 넘도록 일했다"며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일하지 않았나"라고 되물었다.
반백을 훌쩍 넘긴 나이. 정 씨도 이제 여유를 찾고 싶지만 문제는 지긋지긋한 돈이다. 50대 남성에게 돈보다 가혹한 게 있을까.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자식'이다.
요즘 아이들은 '밥이 아니라 돈을 먹고 자란다'는 게 50대 가장들의 얘기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온갖 학원에, 대학 등록금에, 이젠 시집 장가 보낼 일까지 남았다.
코피 흘려가며 벌어놓은 돈을 다 쓰고도 모자라 은행에 손 벌리고 나면, '더 늙어서 일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어쩌나' 두렵기만 하다.
빚더미에 오른 50대는 단순히 운 나쁜 몇 명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실질 가계부채는 1100조 원에 육박한다.
집을 팔아도 대출금과 전세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인 담보가치인정비율(LTV) 80% 이상 대출도 3조 원이 넘을 정도다. 특히 50대가 가장인 경우는 한 가정당 평균 7500여 만원의 빚을 안고 있어 각 세대 가운데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다.
누구나 힘들던 그 시절. 나만 혼자 고생한 게 아니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정 씨 역시 "아내가 함께 일하지 않았으면 애들을 못 키웠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50대 남성의 가슴 한켠에는 사무치는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경쟁하며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뒤돌아보면 직장 동료들은 어디론가 흩어졌다. 고향이나 학교 친구들은 서울 올라와서 각자 먹고살기 바쁜 탓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
험난한 사회생활에서도 '내 새끼, 내 마누라만은 따뜻한 밥 한 끼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지만,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곳은 역설적으로 집이다.
북한산에서 만난 김득호(59) 씨는 그나마 퇴근이 빨랐던 공무원 출신인데도 자식들과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아직까지 모른다.
김 씨는 "일찍 일어나 늦게 퇴근하며 직장생활만 했으니 자식들과 제대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며 "이제 와서 뒤늦게 얘기해보려고 해도 자식들이 먼저 피한다"고 털어놨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돈 얘기만 나오면 '가장'이라 부른다. 평생을 등골이 휘도록 일했는데, 아직도 더 벌어오라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정 씨는 "초등학생 때에는 아이들이 아빠밖에 몰랐다"며 "지금도 그때 내 품에 안기던 아이들 생각하면서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일한다"고 웃었다.
마른 멸치를 등에 인 이 씨는 어느새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 바위에 걸터앉아 가져온 막걸리 한 모금을 점심 대신 마신다. 오후 1시가 넘었다. 이 씨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시 내려간다.
그래도 돌아갈 곳은 집뿐이다. 아비 고생하는 줄은 알았는지, 아들은 군대 가기 직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한다.
자식 고생시키는 죄인인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말릴 여력이 없어 더 괴롭다. 올라가던 발걸음보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더 무거운 건, 비단 등산뿐만이 아닌 것이다.
⑤60대 '낙'이 없다
http://news.nate.com/view/20130913n02664
강력한 가부장제의 사실상 마지막 세대인 노년 남성들은 시대가 바뀌자 역풍의 한 가운데 홀로 서게 됐다.
황덕수(가명·69)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가장이었다. 6.25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뒤 그야말로 맨 주먹으로 시작했다.
포항제철 1기로 입사해 산업 역군으로 대한민국을,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다. 전통적인 엄부(嚴父)로서 가족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은퇴를 하고, 자식들이 독립하면서 가장의 권력은 쇠락했다. 자식들은 그래도 명절마다 찾아오지만, 가부장적 권위로 오랜 기간 쌓은 벽 때문인지 살갑게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들은 부인과 같이 있을 때 더 편안해 보였고, 황 할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 할아버지는 "분가한 자식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손자들을 보러 찾아가면 아들이나 며느리나 반기지도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순종적으로 자신을 따랐지만 자식들이 독립하자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동네 사교모임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등 집밖 활동에 열심이었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황 할아버지는 "나이가 드니 집사람과 점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나 어렸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과는 달리 대우만 받으려고 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결국 대화가 안 통하는 건 은퇴하고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실제로 대한노인회가 만 60세 이상 노인 2541명에게 물어보니 남성 68%는 '가장 위로되는 사람'으로 배우자를 꼽았다. 반면 여성은 34.3%만 배우자를 의지한다고 답했다.
대신 여성의 38.2%는 자녀를 의지한다고 답했지만, 남성은 18%에 불과했다.
노년 남성은 여성에 비해 사교생활에 의지하는 비중도 떨어졌다. '경로당 친구'를 의지한다는 비율은 여성이 12.9%였지만 남성은 5.6%에 불과했다.
이러다 보니 과거 가부장적 가족에서 군림했던 노년 남성은 안팎에서 눈치를 봐야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근수(가명·65) 할아버지는 가정에서 설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이런 울분과 불만을 입밖에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할아버지는 "매 순간마다 지적하고 싶지만 옛날 가부장제 시절처럼 이야기했다가는 쫓겨난다"면서 "가정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입을 닫는 수밖에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래도 내가 집안의 어른인데 혼담 같은 중요한 문제는 상의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정리한 뒤 '돈만 내라'는 식으로 하지만 지적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황 할아버지나 이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부인과도 같이 살아 사정이 나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혼자 사는 노년 남성의 생활은 훨씬 더 비참하다.
서울의 한 구청 사회복지사는 "혼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활은 비교가 불가할 수준"이라고 입을 열었다.
지난 4년 동안 독거노인 방문 업무를 한 이 복지사는 "할아버지들은 살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식주 자체가 안 돼 식사 같은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한다"면서 "방 문을 열면 악취가 날 정도"라고 증언했다.
통계청의 '2011년 사망원인통계' 가운데 60대 이상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3배 이상 높다는 대목은 통계적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펼쳐진 인생 이막. 하지만 쇠락한 가부장들에겐 이렇다 할 낙이 없는 '홀로선 무대'일 뿐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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