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럭 한올까지…'왕의 얼굴'에 권위를 입히다
조선시대 ‘어진’ 어떻게 그렸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폴란드, 천년의 예술’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폴란드 왕들의 초상 모음’을 만난다. 1730년쯤의 작품으로 새의 몸통에 왕의 얼굴을 묘사한 작은 그림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건 왕의 얼굴 표현에 엄격했던 우리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공동 작업으로 제작한 ‘어진’(御眞)을 통해서만 얼굴을 드러냈다. ‘어진 모음’이니 하는 형식은 없었고, 폴란드의 그림에서처럼 성근 묘사는 용납되지 않았다. 1935년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 전해진 어진은 46점이었다. 하지만 현전하는 것은 극히 적다. 예나 지금이나 ‘용안’(龍顔·왕의 얼굴)은 귀하고 귀하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태조 어진.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의 어진은 서울은 물론 지방의 여러 곳에 건물을 세워 따로 보관할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얼굴을 알 수 있는 어진은 3점뿐
1954년 12월 10일 부산 용두산에서 난 불이 피난민들의 판자촌을 덮쳤다. 화마는 또 어진 수십점을 불살랐다. 창덕궁 신선원전에 있던 것을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겼는데, 보관장소가 용두산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없어진 어진의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고, 1935년 기록에 근거해 40여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의 화재로 어진 대부분이 소실돼 현재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진으로 모습을 남긴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면 태조, 영조, 철종의 것뿐이다.
태조 어진은 26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현재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전북 전주시 어진박물관에 있는 ‘조선태조어진’(국보 317호)이다. 창업주라는 무게감 때문에 서울의 문소전, 출생지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 본관인 전주의 경기전과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을 따로 지어 보관했다. 이 중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전하는데 고종 9년(1872) 박기준, 조중묵 등이 다른 어진을 원본으로 해 옮겨 그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부산의 화재 때 타고 남은 것과 1913년 촬영된 어진을 참고해 다시 그렸다. 경기전 어진 속 태조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모습을 묘사했다. 용포도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라는 점이 다르다. 51세 때의 모습을 그린 영조 어진은 보물 9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전하는 것은 1744년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것을 1900년 다시 그렸다. 영조는 왕자 시절의 모습을 묘사한 ‘연잉군 초상’(보물 1491호)도 전하는 유일한 임금이기도 하다.
철종 어진(보물 1492호)은 화재로 입 주위와 몸통의 왼쪽 부분이 훼손됐으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어진은 철종의 사시(斜視)를 표현하고 있어 어진이 사실적 묘사에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외에 순조, 익종(후대에 추존된 순조의 아들)의 어진이 전하지만 얼굴 부분을 포함해 대부분이 불에 탄 상태다.
1954년 부산의 화재 때 일부가 불에 탄 철종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어진은 최고 권위의 표현
조선에서 왕의 얼굴 묘사는 어진을 제외하면 금기와도 같았다. 왕이 주최한 연회나 행사 등을 묘사한 그림에도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용상(龍床) 등으로 존재를 표시했다.
왕의 얼굴이 가지는 권위는 1713년 숙종 어진의 초본을 검사할 때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초본이 실제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가 관건인데, 검사하는 대신들조차 수시로 용안을 올려다보기가 쉽지 않아 표현의 정확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손명희 학예연구사는 “어진은 의례나 제향의 대상이 되었고, 임금의 권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사진이 도입된 이후에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해 어진을 찍은 사진이 드물다” 설명했다. 윤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이런 엄격함은 중국, 일본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그는 “청나라 옹정제는 서양 귀족, 한족, 티베트 승려 등으로 자신을 묘사한 그림을 남겼다”고 전했다.
어진에 화가의 개성이 담기는 것도 금기시됐다. 정확한 형태를 그려내는 것을 중시한 조선의 초상화에 적용된 대원칙인데, 어진의 경우는 더했다. 1735년 영조는 세조어진을 모사한 박동보가 자신의 개성을 어진에 드러내려는 집착을 가졌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2859377&viewType=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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