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으시죠?"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장모(25)씨는 얼마 전부터 '기부'를 강요하는 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거기는 공짜로 해줬으면서 우리는 왜 안 해주는 건데요? 우리도 좋은 일 하는 단체라고요." 형편이 여의치 않다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자동응답기처럼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노원구의 한 공원 담벼락에 재능기부로 그림을 그려준 뒤부터 생긴 일이다.
장씨에게 전화를 걸어온 단체는 10여곳에 이른다. 주민자치회, 아파트 부녀자회, 주민회 등 지역과 명칭은 달랐지만 막무가내로 자기 마을에도 그림을 그려달라는 점에선 꼭 같았다. 장씨는 "대부분 수고비는커녕 물감값도 대줄 수 없다면서도 벽화를 그려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재능기부라고 해도 재료는 그쪽에서 준비해주시는 게 원칙이라고 했더니 '예술한다는 놈이 돈부터 밝혀?'라며 대뜸 반말을 해대는 사람도 있었어요."
재능기부란 개인이 가진 재능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지난해 100여개 단체 163만명이 재능기부에 나섰다. 언론에선 '새로운 기부 문화' '기부 3.0'이라며 밝은 면만 부각했지만, 요즘 들어 재능기부에 나서는 사람이 부쩍 줄어들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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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기부자들은 "생떼를 쓰거나 기부자의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대생인 장씨는 "동기들 사이에선 재능기부가 아니라 '재능착취' '재능갈취'란 말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재능기부를 안 좋은 기억만 잔뜩 안고 그만두기 시작한 친구가 많아요. 이쪽은 아직 기부할 마음도 없는데 저쪽에서 멋대로 '재능기부'라는 어음을 발행한 다음 이쪽에 당당하게 결제를 요구하는 격이라고 할까요."
◇가난한 예술인 울리는 사례 잇따라
금속공예인 김모(37)씨는 4년 전부터 재능기부를 해왔다. 지역 고등학교에서 무료로 미술 수업을 하거나 사회단체에 자신의 공예품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김씨는 올해 초 모든 활동을 접었다. 재능기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재능이 '공짜'나 '헐값'이 돼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술 노동을 기부하는 내 행위가 오히려 '예술 노동은 대가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확산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예컨대 김씨에게 공예품 제작을 의뢰한 한 문화단체의 행태가 그랬다. "재능은 기부할 수 있다. 재료비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죠. '원래 다 공짜 아니었느냐'는 답변이 돌아와 말문이 막히더군요." 김씨는 "저 같은 공예가들이 재능기부를 하면 할수록 공예품 제작이나 전시는 '공짜나 마찬가지'라거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손쉬운 대안'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좋은 일 하는 데 재능을 기부해 달라'는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김씨는 말했다. "언론에 '재능기부하는 공예인'으로 알려지면서 작품 의뢰는 사라지고 '재능기부 좀 하시라'는 요청만 와요. 거절하기 어려워 하나씩 일을 맡다 보니 어느새 본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가난한 예술가들의 예술 노동을 공짜로 쓰려는 대열엔 일부 지방자치단체도 끼어들었다. 지난해 3월 재능기부자를 공개 모집한 서울 강동구가 그런 경우. 강동구는 구내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모집하며 '벽화 재능기부자'를 찾는다는 공고를 냈다. 하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고 없던 일로 했다. '재능기부는 재능 있는 사람이 형편이 안 좋은 개인이나 단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제안하는 것이지, 예산이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재능기부를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실제로 강동구는 이전까지 벽화 그리기 사업에 사업비를 책정, 예술인들을 고용했었다고 한다. 재능기부 열풍이 자칫 가난한 예술인들의 예술혼을 꺾고 이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능기부 수요는 느는데 기부자들은 회의적으로
재능기부를 하고도 뒤통수를 맞는 건 예술가들뿐만이 아니다. 세무사 윤공일(44)씨는 "재능기부는 내 시간당 임금을 기부하는 것과 같지만 3년째 하고 있는 건 '보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재능기부를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보람은커녕 불쾌한 감정만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장에 5만원, 10만원 하는 세무 기장 대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재능기부를 요청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어요. 내 재능이나 선의가 낭비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면, 결국엔 재능기부가 진짜 필요한 사람들이 정작 혜택을 못 받게 된다. 금속공예인 조수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에 다들 앞다퉈 달려가곤 했어요. 이젠 그렇지 않아요. 좋은 의도로 나선 사람들을 이익집단이 이용하고 빠지니까, 이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도 제가 너무 지쳐버렸어요. 그런 사람이 저뿐일까요. 예전에는 재능기부하는 사람이 10명이었다면 지금은 2~3명이나 될까요?"
재능기부자와 수혜자를 연결해주는 사회적기업네트워크 김정모 센터장은 "재능기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매년 10% 이상씩 성장하는 추세지만 기부자들이 회의적, 소극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계속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재능을 기부받는다'는 생각 대신 '(기부자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고 혼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현실적으론 기부자와 수혜자가 일대일로 만나지 않고 저희 같은 기관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개인적으로 찾아가 '무료로 해주셨다고 들었다. 나도 공짜로 해달라'고 하는 것까지 막을 방도는 없죠."
예술인 재능기부 단체에 참여하고 있는 소설가 성석제(54)씨는 "재능기부라는 건 어디까지나 자발성이 전제가 돼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캠페인처럼 할 일이 아닌데 기부하라고 사람들에게 몰려다니면서 이끌어내는 건 문제죠. 재능이라는 건 사람이 타고난 천분과 노력에 의해 얻은 전문성인데, 그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가 미처 주어지기도 전에 강압적인 방식으로 기부를 하라니, 말뜻이 왜곡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씨는 "예술가들의 열정을 이용해서 자기 배 불리기에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재능기부
개인이 가진 전문성을 발휘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봉사활동이다. 초창기엔 각 분야의 전문가가 전문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벌이는 봉사활동을 뜻했다. 근래에는 전문가에 한정하지 않고 일반인의 재능을 통한 봉사활동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1402140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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