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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된장녀 맥도날드 할머니

Flyturtle Studio 2013. 12. 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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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할머니는 된장녀의 미래다]



원조 된장녀 맥도날드 할머니가 주는 교훈


속물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해 한방에 인생역전을 이루고 싶어하는 그녀의 욕망을.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명품을 척척 살 수 있고,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영화 같은 삶을 마다할 여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문제는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 욕구를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해피 엔딩이 어렵다는 점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블루 재스민>은 에르메스 '버킨백'으로 상징되는 미국 된장녀의 추락을 보여준다. 보육원에서 자란 주인공 재스민은 수완 좋은 사업가 남편을 만나 명품을 휘감고 파티를 즐기는 뉴욕 최상류층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신데렐라 같은 그의 인생은 단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나버린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됐고, 남편의 사업은 망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남편은 사기꾼이었다. 남편에게 버림 받고 빈털터리가 된 그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만난 동생 진저의 신세를 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이혼과 파산으로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면서도 재스민은 마트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남자와 인생을 즐기며 소박하게 사는 동생 진저를 루저로 치부한다. 이런 주인공을 통해 우디 앨런은 무슨 얘기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명품과 보석, 좋은 집과 같은 '돈'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아서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둔다면 쉽게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모든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교훈을 던져준다.



된장녀 잔혹동화, 맥도날드 할머니 


된장녀의 우울한 결말은 그저 냉소적 감독의 극적 설정일 뿐이라고? 여기 '원조 된장녀'라 불릴만한 맥도날드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다.



매일 밤 9시만 되면 맥도날드에 나타나 새벽 4시까지 새우잠을 자다 사라지는 할머니. 10년 넘게 거처 없이 하루의 대부분을 맥도날드, 교회 그리고 스타벅스를 오가며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24시간 동안 한번도 땅에 눕지 않고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맥도날드 할머니의 라이프스타일은 '현대백화점 종이가방', '트렌치코트', '스타벅스 커피', '영자신문'으로 요약된다. 편히 누울만한 쪽방 한 켠 얻을 돈은 없어도 이런 사치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방송국 취재결과 이 할머니는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외교통상부에서 근무한 엘리트 여성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왕자'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방송에서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보고 친 여동생과 여고 동창생들, 심지어 방송제작진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지만 할머니는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고행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태초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라면서 "자신의 본체인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사람'은 세상을 지휘하는 지도자일 것이므로 자신도 그 격식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젊은 시절 할머니의 집은 가난해서 남의 집에 단칸방을 얻어 살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했다. 세상을 지휘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된장녀의 이상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 또 그 환상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 맥도날드 할머니는 적나라한 증인이 되어 시청자 앞에 나타났다. 



한국 유독 된장녀 비화도 넘쳐나 


한국이 세계 1위 된장녀 국가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한국 여성들이 외국 여성들에 비해 남성의 경제력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글로벌 사이트 커플닷넷(couple.net)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한국을 포함한 121개국 싱글남녀 8만2417명을 설문 조사해 얻은 결과다. 커플닷넷은 남녀 만남의 조건을 경제력(사회경제적 조건), 외모(신체적 매력), 가정환경, 성격 등 4가지로 정리해 백분율로 나눈 다음 합이 100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남성과 여성의 배우자 선호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여성들은 유별나게 경제력을 따지는 대신 외모를 가장 적게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력을 크게 고려하는 여성들은 북미(32.0%), 오세아니아(31%), 아프리카(29.3%), 유럽(28.3%), 아시아(28.2%), 남미(26.1%) 순으로 많았다. 한국여성은 북미여성보다 더 높은 36.2%로 집계됐다.



여자들이 본인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남자를 통해 신분상승 욕구를 해소하거나 경제적 안정욕구를 누리려는 속물근성이 세계 어느 곳보다 높다 보니 맥도날드 할머니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비화가 넘쳐나는 것은 당연지사다.


대학생 A씨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지만 명품으로 몸을 휘감는 명품족이다. 학생신분으로 살 수 없는 몇 백 만원 짜리 명품을 사들이던 그는 급기야 대머리 아저씨와 이른바 '스폰서 만남'을 갖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성형수술로 얼굴까지 망쳤다.


B씨는 명문대에 입학한 재원이었다. 하지만 성형수술에 명품, 고급 자가용 구입 등에 돈을 흥청망청 썼고 카드 빚 때문에 일본 유흥업소에 취직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빼어난 미모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C씨. 스펙 좋은 남자들을 어장관리하다 그 중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남자와 결혼해 신분상승의 꿈을 이뤘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신분상승과 부(副)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져갔고, 외도를 일삼다 결혼생활의 파멸을 맞고 말았다.



된장녀의 해피 엔딩이 어려운 이유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과 물질적 욕망을 단번에 충족시켜보고 싶어하는 된장녀의 심리는 로또를 믿고 인생역전을 기대하는 무모한 한탕주의를 닮았다.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에 의존적인 삶을 살며 요행만을 바라는 인생관이 파국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영화 <블루 재스민>에서 보듯이, 돈의 가치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는 삶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 같은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성공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종착점은 모든 것을 잃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뉴욕 된장녀 재스민이나 맥도날드 할머니, 그리고 수많은 된장녀들의 불행한 결말일 수밖에 없다.


http://www.yeowooji.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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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할머니가 쓸쓸히 눈을 감으셔야 했던 이유]


 2013년 07월 12일, 백발의 권하자 할머니께서 오랜 삶을 마치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복막암을 앓고 계셨던 권할머니는 장례를 치러줄 가족도 없이 쓸쓸히 눈을 감으셨다. 무슨 사연이 얼마나 기구했기에 할머니는 아픈 몸을 혼자 이끌어야 했을까?



매일 밤 9시가 되면 할머니는 맥도날드에 오셔서 새벽 내내 계셨다. sbs 취재 결과, 할머니는 24시간동안 커피 한 잔을 드셨고,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 맥도날드나 교회에서 쪽잠을 주무셨다. 낡은 바바리코트를 입으신 채 커피를 드시며 영자신문을 읽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영락없는 멋쟁이 할머니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신문이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과 질끈 묶은 백발의 머리, 지친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은 그저 소외된 이웃이었다.



sbs 취재진들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쉼터를 권했다. 요양원이나 병원을 가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취재진에게 레스토랑에 가고 싶다고 말하며, 호텔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는 마치 수용소와 같은 쉼터와 요양원에 가지 않으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송을 본 몇몇의 사람들이 ‘할머니 된장녀’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를 강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로서는 할머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내미는 손길은 전부 거절하셨고, 할머니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이 없고, 여유가 없는 노인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거나 호텔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것일까? 도대체 할머니와 같이 방치되어 있는 독거노인들은 왜 혼자 계셔야 했고, 왜 한사코 도움을 거절하시는 것일까?



할머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과를 60학번으로 졸업하셨고,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에서 근무하셨다. 어려웠던 시대에도 할머니의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대학에 보내고자 하셨기 때문에,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에도 할머니는 엘리트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은 큰 딸인 할머니에게만 향하였고, 남은 동생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다. 어렵게 찾은 할머니의 여동생이 “언니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게 된 이유였다. 어머니 또한 열심히 키운 딸을 조금 더 나은 상대와 결혼시키고자 결혼할 시기를 미루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몸이 아파왔지만, 할머니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에 친구가 되어준 사람은 주한 캐나다교육원 강사 스테파니 세자리오라는 외국인이었다. 그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 또한 외로움으로부터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과거의 삶에 붙들려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해서 그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치부해선 안 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홀로 쓸쓸히 죽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에 홀로 계셔야 했던 이유가 할머니의 잘못이 아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에 고 권할머니와 같은 무연고 사망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혼자 사는 노인의 비율은 1994년 16.2%에서 2004년 24.6%로 증가했고, 그 중 62.4%가 절대 빈곤의 상태에 놓여있다.(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과교수, ‘독거노인 실태와 정책과제’, 2007) 전국 무연고 사망자는 2010년 647명에서 2012년 810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경기개발연구원 김희연 사회경제센터장, ‘무연사회(無緣社會), 우리의 미래인가?’) 해마다 100명 정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정부는 독거노인을 위한 방문 사회복지사를 지원한다. 그리고 그들을 더 편하고 건강하게 지내시라고 쉼터나 요양원을 권한다.




그래서 쉼터와 요양원의 실태에 대해 알아봤다. kbs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는 노인요양원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내부가 위험하고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2010년에는 포항의 요양원에서 불이나 10명이 사망하고 2012년에도 노원구에서 불이나 많은 수의 노인들이 다쳤다. 노인요양원 폭행뉴스는 간간히 뉴스를 타고 심지어 어느 요양원에서는 치매노인을 방에 묶어놔 충격을 주었다. 요양원의 사정도 딱했다. 가족들이 요양원에 맡긴 후 연락을 끊어 손 쓸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경로당과 같은 곳들은 갈 곳이 없는 노인들이 쉬고 가기 좋은 곳이나 전적으로 지자체에 운영을 맡기다 보니 운영체제에 나이제한을 두는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방치와 다를 바 없는 관심에 오히려 사기와 같은 범죄의 타깃이 된다.



이는 고 권할머니께서 한사코 요양원에 가지 않으시려고 했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병약하다고 해서 그들을 무관심 속에 모아두고 방치한다면, 심각한 인권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할머니는 할머니를 이해해주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준 세자리오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세자리오 또한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거노인은 편의를 위해 요양원에 ‘수용’되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중요하고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돌아가신 권 할머니께서 생전에 못 다하신 꿈과 사랑을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는 행복하게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 땅에 계신 홀로 사시는 노인들의 복지도 점차 나이지기를 기대해 본다.


http://dolearndorun.tistory.com/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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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


지난 10월 10일, 한 노인의 사망 소식으로 인터넷은 떠들썩했다.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씨가 지난 7월 ‘무연고 변사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권씨의 별세에 대한 최초이자 자세한 뉴스를 보도했던 기자가 전하는 맥도날드 할머니의 외롭지만은 않았던 마지막 가는 길.



권하자씨(73)는 인터넷에선 유명 인사였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워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에서 일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왜 노숙생활을 시작해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권씨를 유명하게 만든 건 다른 이들과 다른 노숙생활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입었다. 영자신문을 가득 담은 쇼핑백을 항상 들고 다니며, 24시간 커피숍과 패스트푸드 매장 등에서 밤을 새웠다. 이 독특한 생활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졌다. 2010년에는 한 공중파 방송에 소개돼 몇몇 사람들이 도와주겠다며 접근했지만, 그는 “내 방식대로 남은 생을 이어가겠다”라고 답해 의문을 자아냈다.



‘푸른 눈의 친구’, 병세 알고 입원 도와


사람들의 도움을 마다할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몸의 질병은 어찌할 수 없었다. 권씨의 몸에 이상이 발견된 건 지난 5월 말. 당시 그와 만나 말동무를 해주던 캐나다인 스테파니 세자리오씨(28)가 병세를 알아채고 병원에 입원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할머니에게서 문제를 발견한 건 석가탄신일 즈음이었을 거예요. 그 전부터 몸이 안 좋았어요. 당시 저는 잠시 부산에 갔다 왔는데, 돌아온 뒤 만난 할머니는 무척 아파 보였어요. 그래서 ‘반드시 보호소에 가야만 한다’라고 설득해 승낙을 얻어냈죠.”


‘푸른 눈의 여성’인 세자리오씨가 권씨를 처음 본 것은 2011년이다. 정동 주한캐나다교육원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인근에서 돌아다니는 권씨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밤늦게 항상 맥도날드에 있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권씨가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걸자 생각이 달라졌다.


“제가 할머니를 스타벅스에서 다시 만났을 때, 유창한 영어로 ‘당신은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사람의 외모만으로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여성은 매주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의 옛 직장, 학창 시절 이야기부터 정치, 문화, 삶의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자리오씨는 “난 할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 대해 책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권씨의 발병으로 잠정 중단돼야 했다. 권씨의 병세를 알아차린 세자리오씨는 경찰과 119구조대 등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그녀를 국립의료원으로 안내했다. 권씨는 병원에 입원한 뒤 세자리오씨에게 “그때 당신이 날 데려오지 않았다면 난 길에서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병상에서도 지킨 특유의 생활


권씨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한 뒤 암이 복막까지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씨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도 울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당시 권씨를 문병했던 새문안교회 백충현 목사는 “실패를 겪고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한 경우가 많은데, 그와는 또 달랐다”라고 회상했다.


품격을 잃지 않고 우아한 태도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은 병원에서도 이어졌다. 병문안을 온 교회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 “용돈으로 쓰시라”라며 돈을 건넸는데, 권씨는 “의료원의 간호가 만족스럽지 않다”라며 일일 간병인을 고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자신의 용돈으로 포도주스를 사다달라고 자주 부탁했다. 길거리 생활을 해온 그에게 포도주스는 포도주를 대신하는 품격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도 죽음이 다가오자 조금씩 변해갔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무릎께까지 내려온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 권씨는 평소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라며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다. 하지만 병상에 눕자 긴 머리가 문제가 됐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꼭 긴 머리만을 아름답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를 설득했고, 권씨는 곰곰이 생각한 뒤 수년간 지켜온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임종이 다가올수록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다. 권씨는 노숙생활을 시작한 뒤 가족과 연락이 끊겼고, 가족의 소재 역시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병상에서 “오빠가 참 좋았는데, 지금 미국에 가 있다. 나도 미국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그가 말한 오빠는 셋째 오빠(83)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 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도 돈을 보내주는 등 여동생을 도와줬으나 권씨가 연락처를 잃어버려 연락이 두절됐다.


권씨는 가끔 막내 여동생 이야기도 했다. 앞서 그의 여동생은 한 방송에서 “언니가 나타날까봐 겁이 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권씨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동생이 인천으로 시집갔다. 어렵게 사는 것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투병생활, 그 뒷이야기


권씨의 투병생활은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권씨는 세자리오씨의 도움을 받아 국립의료원에 입원했지만, 난치 판정을 받은 뒤에는 한없이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서둘러 다른 요양원으로 옮겨야 했지만 주민등록이 말소됐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권씨를 돌본 국립의료원 이승민 복지사와 새문안교회 측은 병상에 있는 권씨 대신 그의 주민증을 다시 등록하기로 했다. 그러나 의료원 인근 주민센터에서는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라며 발급을 거부했다. 다행히 그의 이전 주소가 있던 사직동 주민센터에서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수속을 허락했다. 재발급을 위해 내야 했던 과태료(3만원)는 교회에서 부담했다.


주민등록이 재발급됐지만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권씨를 받아주는 요양원은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시가 운영하는 노숙인센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승민 복지사가 요양원들을 수소문한 끝에 ‘새희망요양병원’으로부터 무료로 돌봐주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로소 권씨는 길거리로 다시 내몰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비교적 평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병상에 있을 때는 교회 사람들이 권씨와 함께했다. 새문안교회 백충현 목사는 “내가 기도해드리면 무척 고마워하시고 자주 와달라는 말씀을 하셨다”라며 “행여 바빠 못 가는 날이면 의료원 복지사를 통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래서 우린 더 시간을 내 최대한 뵈러 갔다”라고 회고했다. 병원에서 권씨에게 ‘마지막’을 통보했을 때도 교우들이 옆을 지켰다. 임종기도는 백 목사가 주재했다.


“기도를 시작할 때 할머니는 좋아하던 포도주스도 못 넘기셨고, 거의 의식이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 왔어요’라고 인사하니 눈빛으로만 답하셨고, ‘천국 가실 수 있죠?’ 여쭤보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권씨는 이로부터 4일 뒤인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연고 변사자로 처리돼 화장된 뒤 경기 파주시 서울특별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


그의 죽음은 비교적 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사망한 지 석 달이 흐른 지난 10월 10일에야 첫 보도가 이뤄졌다. 임종을 지킨 교회 관계자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언론에 알리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터넷에는 추모의 글이 넘쳐났다. 그의 사망을 알린 기사에는 3천 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고, 누리꾼들은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한 누리꾼은 “비록 삶의 방식은 독특했지만, 할머니 뜻에 따라 살다 가신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살아생전 민폐 안 끼치고 사신 분이니,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이라고 전했다.


당초 권씨의 사망은 언론 등에 ‘외로운 죽음’으로 표현됐다. 권씨의 임종까지 도와준 이들의 사연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다. 권씨가 투병생활 하는 동안 그를 지켜본 백충현 목사는 “권 할머니 곁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해준 만큼, 그렇게 외롭게 가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자리오씨 역시 권씨의 임종을 지켰다. 권씨는 죽기 전 세자리오씨에게 “지금은 당신이 내게 유일한 가족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자리오씨는 “할머니 역시 나를 구한 사람이다”라며 “그녀를 만날 때면 삶의 휴식과 여유에 대해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세자리오씨는 권씨가 떠나는 날 밤,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전했다. 권씨와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낯선 땅, ‘특별한’ 할머니와의 동화 같은 만남. 그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할머니가 과거의 삶에 붙들려 있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해서 정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전 할머니가 영원히 평화롭게 쉬셨으면 좋겠어요. 그녀 역시도 삶이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바람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1311061520391&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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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할머니 임종 지켰다던 공무원 “사실 아니다”


일명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고 권하자(73·사진) 옹이 무연고 변사자로 사망할 때 한 공무원이 할머니 곁을 지켰다는 보도가 오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권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던 것으로 알려졌던 서울 중구청 사회복지과 소속 손석희(45) 주무관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해명한 것.


23일 손 주무관은 “그 분의 임종을 지켜보지는 못했다.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구청 차원이 아닌 병원에서 하는 것이다. 기사가 잘못 나갔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음이 아프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맞다. 하지만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를 하다 보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는 의미”라며 “권 할머니 한 분에 대해서만 한 말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앞서 23일 오전 한 매체는 맥도날드 할머니가 임종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준 공무원을 손 주무관으로 소개했으며, 그가 “마음이 아팠다”며 “관련 업무를 한 지 21년이 지났지만, 권 할머니를 보내드릴 때 처음 업무 때와 마찬가지 감정이었다”는 심경을 보도했다.


손 주무관은 1992년 중구청 사회복지과에 첫 발령을 받은 후 노숙인 상담, 노숙인 시설, 무연고 변사자의 사망 후 뒤처리 업무를 맡고 있다. 무연고 변사자 통보가 오면 유족들에게 공문으로 통보하거나 신문, 구청 홈페이지에 이를 공고하고 있다.


고 맥도날드 할머니에게는 서류상 오빠가 있지만 오빠마저 2010년 거주불명자로 등록돼 변사자 통보 서류가 반송, 결국 무연고 변사자로 처리됐다. 손 주무관은 “맥도날드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해 서울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맥도날드 할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간 이는 외국 말동무 친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 주한 캐나다교육원 강사인 스테파니 세자리오(28)는 지난 5월 맥도날드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된 것을 파악하고 국립의료원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 옹은 입원한지 두달만인 지난 7월 12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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