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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는 창의성만 바란다 (2)

Flyturtle Studio 2012. 1. 29.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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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품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새끼는 알에서 깨어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정용 기자

 

 ‘아하!’



00thought부화의 다음 단계는 통찰이다. 보통 통찰이라고 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말하는 통찰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문제 해결에서 통찰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문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를 “아하 경험(aha experience)”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전혀 모를 듯하던 문제가 갑자기 ‘아하!’ 하고 해결책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하 경험”의 예로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시라쿠사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왕관을 부수지 않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은이 섞여있는지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던 와중에 해결책을 깨닫고 “유레카!”(‘발견했다’라는 뜻)를 외치며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금과 은은 비중이 달라서 같은 무게라면 은이 부피가 더 크다. 따라서 은이 섞은 왕관을 물로 가득찬 수조에 담그면 똑같은 무게의 금을 수조에 담글 때보다 물이 더 많이 넘친다.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과학적 발견이 이런 식으로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처럼 흔히 묘사하곤 한다. 추리물들에서도 주인공은 계속 헛다리만 짚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수수께끼는 풀렸다”라고 외친다. 대단한 과학적 발견이나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일은 아니더라도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하고 떠오르거나 이해되지 않던 내용이 어느 순간 이해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 쯤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도 결국은 어느 한 순간에 풀린다고 생각하고, 창의적 사고에서도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퉁이를 돌 때


00snail정확히 말하면 통찰은 답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기분(feeling of knowing)”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이다. 보통 간단한 문제의 경우에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아는 기분이 천천히 증가한다. 예를 들어 85143 + 75296 같은 덧셈을 한다고 하면 조금 귀찮기는 해도 문제가 풀려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의 경우 문제를 풀어가면서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값싼 목걸이 문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사슬을 하나씩 이어나가면 답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이 보이지만, 사슬을 모두 잇고 목걸이를 채우려는 순간 갑자기 막혀 버린다. 이런 문제는 답을 향해 차근 차근 다가가는 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 오히려 멀쩡한 사슬을 풀어서 답으로부터 잠시 멀어져야 한다. 일단 이렇게 답으로 멀어지고 나면, 갑자기 문제는 세 개의 사슬을 세 개의 고리로 연결하는 간단한 문제가 된다. 마치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다가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니 찾던 장소가 눈 앞에 보이는 것과 같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그 모퉁이 뒤에 찾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통찰의 순간은 그 모퉁이를 발견한 순간이 아니라 그 모퉁이를 돌아서 찾던 장소가 눈 앞에 보일 때 온다. 실제로 사람들은 통찰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문제를 풀 열쇠를 알고 있다. 다만 그 열쇠가 맞는 열쇠인지 아닌지 알지 못할 뿐이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00questionmark인지과학의 창시자 중에 한 명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1916~2001)은 사람들이 통찰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문제를 풀 열쇠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4) 그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주었다. “아래 그림처럼 가로 8칸, 세로 8칸인 눈금이 있다.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 끝 칸이 잘려서 모두 62칸이다. 두 칸 크기의 블록 31개를 눈금 위에 얹어서 눈금을 모두 덮어라.”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 문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를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눈금을 아래 그림처럼 체크 무늬로 칠해보면 검은 칸이 32개, 흰 칸이 30개가 된다. 두 칸짜리 블록을 눈금에 올리면 반드시 검은 칸 하나와 흰 칸 하나를 동시에 덮는 홀짝성(parity)이 있다. 그럼데 검은 칸이 흰 칸보다 많기 때문에 블록을 어떻게 덮어도 검은 칸이 2개가 남는다. 그리고 이 2개의 검은 칸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두 칸짜리 블록으로는 결코 덮을 수 없다. 따라서 31개의 불록으로 눈금을 모두 덮기는 불가능하다.






두 칸짜리 블록은 반드시 검은 칸 하나와 흰 칸 하나를 덮어야 한다는 홀짝성은 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자 문제의 답으로 가는 모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홀짝성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풀이 시간의 77%를 소모했다. 그동안 이 학생들은 블록을 이리 저리 눈금 위에 놓아가며 31개의 블록으로 눈금을 덮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학생들이 이 홀짝성을 이용해서 이 문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아주 순식간이어서 풀이 시간의 3% 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홀짝성을 발견한 시점부터 홀짝성을 이용해서 문제가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까지 풀이 시간의 20%를 허비하고 있었다. 이 시간동안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학생들은 홀짝성을 발견하고도 이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눈치채지 못했다. 홀짝성을 발견하고도 블록으로 눈금을 덮는 방법을 찾는 데 풀이 시간의 6% 정도를 더 썼다. 그리고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데 풀이 시간의 7% 정도를 썼다. 홀짝성을 눈여겨 본 것은 풀이 시간의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왜 학생들은 문제를 푸는 열쇠를 가지고서도 자신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홀짝성이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사실은 홀짝성을 이용해서 문제를 풀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열쇠는 자물쇠에 넣어보기 전에는 맞는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없고,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그 모퉁이 뒤에 찾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값싼 목걸이 문제와 잘린 눈금 문제는 모두 잘 정의된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들은 주어진 조건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와 비슷한 점이 있다. 값싼 목걸이 문제는 사슬 4개를 연결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슬 3개를 연결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간단하고, 잘린 눈금 문제는 눈금에 숨겨진 홀짝성을 알아내면 쉽다.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는 문제 자체의 조건이나 목표, 풀어가는 단계들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푸는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새롭고 유용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고 낡고 쓸모 없는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부화와 통찰은 마치 이런 새로운 관점이 생각지도 않았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값싼 목걸이 문제와 잘린 눈금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문제를 오래 품고 있어야 부화 효과도 커지고, 통찰은 갑자기 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문제의 열쇠가 바로 그 문제의 열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험일 뿐이다.



아마추어는 창의성만 기대한다




00hand흔히 창의성을 키운다면서 과도하게 새로운 발상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새로운 발상도 중요하고, 호기심이나 다양한 시도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창의적 사고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의성이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유용하기도 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 때문이다. 새롭기만 하고 쓸모 없는 결과라면 창의적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창의성에서 발상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고 있는 반면에, 지식과 노력의 가치는 전반적으로 경시되고 있다. 잘 정의된 문제이건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이건, 기초적인 지식과 기술을 쌓고 오랜 시간 노력해야 잘 풀 수 있다. 와전된 이야기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공부도 못하는 엉뚱한 학생이었고 평범한 특허청 직원이었다가 기발한 발상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고등학교 성적표는 A로 가득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오랫동안 연구에 매진했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 중의 절반은 노벨상을 받은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남들보다 2배는 많은 논문을 써냈다. 그들이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받아서 30세 후반 무렵에야 노벨상에 해당하는 업적을 이뤄냈다.5

수학자 이인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창의성이 있다는 생각은 남들은 모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과 동치이다. 앞 시대를 살다 간 수 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창의성만을 기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프로’는 먼저 수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창의성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수많았던 천재들의 업적을 일이년에 이해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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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Kaplan, C. A., & Simon, H. A. (1990). In search of insight. Cognitive Psychology, 22, 374-419.

5) Zuckerman, H. (1977). Scientific Elite: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 New York, NY: Free Press.
6) 이인석 (2005). 선형대수와 군: 학부 대수학 강의 1.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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