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근성으로모은자료

[김대환의 파이트클럽] K-1, PRIDE의 몰락과 UFC의 삼국통일

Flyturtle Studio 2015. 11. 8. 16:35
320x100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504&article_id=0000000004



종합격투기는 매력적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느끼려면 모든걸 다 잃어봐야 해" 영화 파이트 클럽에 나온 대사입니다. 이처럼 링 위에서는 모든걸 다 잊고 본능을 따를 수 있는 것이 격투기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UFC 한국대회를 맞아 종합격투기의 매력을 더욱 널리 알리고자 칼럼 파이트 클럽을 시작합니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종합격투기의 과거와 현재, 선수들의 링 뒤의 이야기 그리고 UFC 한국대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편집자 주) 


1~3편까지는 격투기 스타들에 대해 이야기해봤다면 이번 파이트클럽 4편에서는 격투 스포츠 단체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90년대 초반 다양한 격투기들이 틀을 깨고 나와 서로 대결하고 교류하며 현재의 종합격투기 시장이 완성됐습니다. 비좁은 링 위에서 펼쳐지는 선수들의 경이로운 대결 외에도 격투 스포츠 단체들의 흥망성쇠는 격투기 팬들에게 큰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수많은 단체들이 탄생하고 사라졌지만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최고의 선수들이 최고의 경기를 선보였던 K-1, PRIDE 그리고 UFC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오늘은 과거 국내 격투기 인기를 양분했던 K-1과 PRIDE, 그리고 현재 세계 최고의 격투 스포츠 단체로 꼽히고 있는 UFC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K-1

 

2000년대 초반 국내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을 시작한 후, 지난 10년 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K-1은 이종격투기를 의미하는 상징적 단어였다. 필자가 격투기 해설을 시작했던 게 2003년 말인데, 그때부터 지금(2015년)까지도 격투 해설가란 직업을 소개하면 “아, 케이원?”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토록 거대했던 K-1이 몰락한 현실을 깨달을 때마다 필자는 신기할 따름이다.

 

K-1의 창시자는 가라데의 한 유파인 정도 회관을 이끌던 이시이 카즈요시 관장이다. 돌아보면 이시이 관장은 격투기 프로모터로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기존 가라데 대회의 틀을 깨고 링에서 경기를 치르거나, 가라데 선수들로 하여금 도복을 벗고 킥복싱 글러브를 끼게 하며 타 유파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선수들이 등장할 때 음악을 사용하게 하는 등 그가 하는 시도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었다.

 

이시이 관장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프로화’, 그리고 ‘방송 진출’. 그는 ‘무도가로서 강해지기 위해서 싸울 뿐, 돈에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고리타분한 관념을 벗어던지고 당시로선 굉장히 큰 액수의 상금으로 선수들을 끌어 모았다. K-1을 개최하기 전 이시이 관장이 개최했던 전일본 가라데 오픈 대회의 상금은 무려 500만 엔 (한화 약 4700만 원)이었고, 1993년 치러진 K-1 첫 대회는 우승 상금만 10만 달러 (한화 약 1억 1300만 원)였다. 이처럼 파격적인 상금에 모여든 세계 최고 타격가들의 경기는 고스란히 일본의 지상파 채널인 후지 TV를 통해 방송되었다. 이종격투기란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이미 프로 스포츠로서 방송과의 연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고 후지 TV란 거대 채널을 신생 격투기 대회에 불과했던 K-1의 스폰서로 끌어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시이 관장의 비즈니스 능력은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K-1 첫 대회(1993년 그랑프리)의 방송 시간은 새벽 2시 반이었지만, 시청률 3.2%에 점유율 50%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헤비급 선수들이 펼치는 호쾌한 승부 및 격투기 특유의 의외성, 그리고 이시이 관장이 중점을 두었던 화려함까지, K-1은 그때까지 일본인들이 본 그 어떤 격투기나 프로레슬링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그들 마음속에 다가왔다. 결국 K-1은 1996년부터는 일본 방송계에서 최고의 편성 시간대로 꼽는 주말의 ‘골든 타임’(저녁 7시-10시)을 거머쥐었고, 이어 1997년부터는 마치 프로야구처럼 한 해 동안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경기를 이어나가다가 연말에 포스트시즌 격인 그랑프리 대회를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시스템을 확립하며 인기 스포츠로 완벽히 자리 잡게 된다.

 

200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K-1 (출처 : 게티이미지)



이때까지의 K-1 흥행 중심축은 앤디 훅과 사다케 마사아키였다. 물론 앤디 훅과 어네스토 호스트, 피터 아츠 트로이카를 중심으로 사다케를 비롯한 제롬 르 밴너, 마이크 베르나르도, 레이 세포 등이 뒤를 받치는 구조였지만, K-1이란 드라마의 주연은 단연 훅과 사다케였다. 훅과 사다케는 가라데 선수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에 ‘가라데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K-1 무대에 도전한다!’라는 근본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명승부를 펼쳤다. 앤디 훅이야 국내에 그 스토리가 많이 소개되었지만 사다케 마사아키는 최근 종합격투기에 빠진 팬들이라면 아예 모르는 분들도 많을 거라 본다. 돌아보면 동양인으로서 입식격투기 헤비급에서 사다케처럼 치열한 승부를 벌였던 선수는 거의 없었다. 밀레니엄 시대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던 무사시가 클린치 위주의 지루한 아웃파이팅으로 일관한 것에 비해, 사다케는 가라데 선수 특유의 강한 로우킥과 동양인답지 않은 완력을 앞세워 큰 서양 선수들과도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으며 큰 인기를 모았다.

 

2000년대로 넘어오며 K-1은 엄청난 상승세에 돌입한다. 홀연히 나타난 거한 밥 샵을 필두로 헤비급 그랑프리의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월드 그랑프리’란 거창한 이름에 더욱 오른 상금으로 흥행에 박차를 가했고, 2002년부터는 중량급 강자들이 격돌하는 월드 맥스 시리즈를 런칭했고, 2003년부터는 연말 대회 다이나마이트를 선보였으며, 2005년부터는 종합격투기 브랜드인 히어로즈도 막을 올렸다.

 

이 당시 일본에서 K-1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K-1의 방영 상황을 돌아본다면, 후지 TV에서 K-1 월드 그랑프리(헤비급 시리즈), TBS에서 K-1 월드 맥스(중량급 시리즈)와 히어로즈(종합격투기 브랜드), 다이나마이트(연말 대회), 일본 TV에서 밥 샵을 필두에 내세운 K-1 JAPAN 시리즈가 방영되었다. 지금 언급한 채널들은 전부 일본의 지상파 채널들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일 격투기 브랜드가 KBS, SBS, MBC에서 각각 다른 시리즈로 방영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원조라 할 수 있는 헤비급 그랑프리 시리즈는 후지 TV에서 무려 17년 간 방송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수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올해로 10주년이란 걸 생각하면, 이 숫자가 얼마나 놀라운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격투 스포츠 컨텐츠가 한 나라의 지상파 채널에서 이처럼 오래 인기를 유지했던 건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하지만 K-1은 화려했던 외형과 달리 2000년대 중반부터 매년 재정난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2010년 이후엔 급기야 복구 불가 상황에 빠지며 파이트머니를 받지 못한 선수들의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특히 인기 스타 레이 세포가 본인은 무려 70만 달러 (한화 약 7억 9천만 원) 이상이 밀려 있으며, 전체 선수들의 미지급액을 합하면 1000만 달러 (한화 약 113억 원)가 넘을 것이란 인터뷰를 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결국 2010년을 끝으로 K-1과 일본 지상파 채널과의 계약은 모두 종료되었고, K-1은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언한다.

 

필자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간 K-1 해설을 맡았는데, 2007년 K-1의 국내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특히 최홍만과 마이티 모 간의 2차전을 메인으로 개최되었던 2007년 한국 대회는 잠실 체조 경기장이 생긴 이래로 최다 유료 관객을 동원했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를 자랑했다. 그런데 2008년부터 거짓말처럼 상황이 반전되었다. 갑자기 K-1이 돈이 없다는 소문이 솔솔 돌더니, 국내 선수들의 파이트머니가 밀리기 시작했다. 시청률도 곤두박질쳤다. 필자는 2008-9년 내내 방송국에 가면 “시청률이 너무 안 나온다. 재계약을 안 하는 건 당연한 얘기고, 현재 계약도 파기될 수 있다.”는 얘기, 국내 프로모터 측을 만나면 “K-1 일본 본사의 자금이 바닥났다. 이번 대회가 진짜 마지막이다. 더 이상은 융통할 돈이 없다.”는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시이 관장이 탈세 혐의로 2007년 구속된 후 K-1이 정상적인 은행 거래를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융통한 부채가 계속 불어나기 시작했고, 결국은 이게 K-1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었다. 으리으리했던 K-1의 위상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파산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아직까지도 K-1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PRIDE 같은 경우 2007년 막을 내리지 않았어도 아마 같은 종합격투기 단체인 UFC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작은 단체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K-1은 달랐을 것이다. 아직까지 입식격투기로 전 세계 어디에서든 K-1의 규모를 넘어선 흥행을 하고 있는 단체는 전무하다. 글로리란 새로운 단체가 미국에서 대회를 치르고 있긴 하나 그 인지도는 결코 높지 않다. 즉, K-1은 내부 관리만 잘 되었다면 계속 세계 최고의 입식격투기 단체로서 남았을 수도 있을 거란 얘기다. 현재 K-1은 중국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으나 그 위상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갑자기 꿈의 무대가 사라진 셈이 된 국내 입식격투가들의 아쉬움을 생각하면, 얼른 K-1이 재기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PRIDE

 

아직까지도 격투기 팬들의 가슴 속에 PRIDE라는 이름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웅장한 테마 음악과 화려한 무대 연출, 여러 선수들의 특색 있는 소개 영상, 그리고 치열한 승부들까지, 지금도 유투브의 PRIDE 영상 밑에는 외국 팬들이 쓴 ‘프라이드가 진짜지! UFC보다 훨씬 낫다!’ 이런 댓글이 가득이다. 하지만 PRIDE가 더 낫다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현실은 이제 PRIDE 과거 영상을 보려면 UFC 파이트패스란 걸 신청해 매달 UFC에 돈을 내야 한다. PRIDE의 영상 및 권한 등 모든 것이 UFC 소유이기 때문이다.

 

PRIDE는 1997년 일본의 프로레슬러 다카다 노부히코와 브라질의 격투가 힉슨 그레이시 간의 대결로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일본 역사상 최고의 종합격투기 단체였던 PRIDE의 출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격투기가 아닌 일본 프로레슬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PRIDE가 출발할 무렵의 일본 프로레슬링은 굉장히 독특했다. 엔터테인먼트 쇼라는 걸 관객들이 인지하고 보는 미국의 WWE 프로레슬링과 달리, 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레슬러들이 각본이 있는 경기임에도 마치 진짜 승부를 벌이는 양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로 경기를 했고, 팬들도 진짜 승부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게 열광을 보냈다. 진짜가 아니란 걸 선수나 팬이나 결국 알고 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그 사실은 잠시 넣어두고 진검승부인 양 함께 몰입하는 희한한 비장미,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가 마치 거대한 트루먼 쇼 세트장 같기도 하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출발은 1951년인데, 그 주요 테마는 일본 프로레슬러가 외국인 거한들을 멋진 기술로 쓰러뜨리는 것이었다.(이 컨셉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역도산이다.) 즉, 일본 프로레슬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2차 대전 후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로 출발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단순히 웃고 떠들며 즐기기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역도산의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가 중심 스타로 떠오른 다음 이런 성향은 더 심해졌다. 이노키는 복싱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와의 이종격투기 경기를 통해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이종격투기의 대부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알리 대 이노키 전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었던 최악의 졸전이었지만, 이노키는 어쨌든 이 경기를 통해 '프로레슬링 VS 타 무술‘이란 흥행 테마를 제대로 확립하며 가라데, 유도 등 타 종목 선수들과의 대결을 계속 치러나가며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프라이드 최고의 스타 효도르와 크로캅 (출처 : 게티이미지)



일본 프로레슬링의 이런 격투기 적 성향은 1980년대에 설립된 UWF에서 절정에 달했다.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등 기존 스타들이 아닌 젊은 선수들이 모인 급진적인 단체였던 UWF는 격투기의 색깔을 더욱 활발히 도입했다. UWF가 내건 모토는 고대 그리스의 종합격투기 판크라치온의 부활이었으며, 가라데카나 킥복서를 초빙해 제대로 된 타격 기술을 레슬러들이 단체로 배우는가 하면, 로프 반동을 이용하는 화려한 프로레슬링 식 기술보다는 오늘날 종합격투기에서 볼 수 있는 타격기나 관절기 공방 위주의 실전적 승부를 벌였다.(물론 각본은 존재했다.) UWF의 스타들은 이후 흩어져 판크라스, 링스, 슈토 등 현재까지도 이름 높은 종합격투기 단체들을 창설하게 되는데, PRIDE의 메인 이벤터로 나서게 된 다카다 노부히코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즉, 그는 ‘실제로 정말 강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프로레슬링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런 슈퍼스타 레슬러 다카다와 그레이시 가문의 최강의 파이터 힉슨 간의 대결로 출발한 PRIDE였지만, 초창기 흥행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다카다가 힉슨에게 너무나 처참하게 진 후 도무지 재기할 만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외국인 강자들을 스카웃해봤자 주연인 다카다가 비실대니 일본 내 흥행에서 답이 없었다. PRIDE 측은 카일 스터전, 마크 콜먼 등과 노골적으로 ‘프로레슬링 식 승부’(쉽게 말해 짜고 한 경기)를 벌이게 해 다카다를 이기게 만들어 주며 인기의 불을 지펴보려 했지만, 그 후에도 진짜 승부만 벌이면 졸전이었기에 일본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를 뒤집어버린 건 다카다의 후배 프로레슬러 사쿠라바 카즈시였다. 일본 종합격투기 역사에서 ‘구세주’란 별명을 갖고 있는 사쿠라바는 호일러, 호이스, 헨조, 하이언 등 당시 일본 프로레슬러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그레이시 가문의 기라성 같은 파이터들을 모두 제압했고, 이 과정은 PRIDE가 마니아들의 스포츠에서 일반 팬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올라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결국 사쿠라바의 활약 덕택에 2000년대 초부터 PRIDE는 이미 K-1을 방영해온 지상파 채널 후지 TV에서 방영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PRIDE는 수년간 전 세계 최고의 종합격투기 단체로 군림했다. 일본 내에서는 사쿠라바 카즈시, 요시다 히데히코, 오가와 나오야 등이 중심이 되어 흥행을 이끌었고,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미르코 크로캅, 반델레이 실바, 마크 헌트,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 등 이름만 들어도 흥분되는 강자들이 명승부를 펼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엔 무사도 시리즈를 런칭해 고미 다카노리 등 새로운 경량급 스타들을 발굴했고, 연말 남제 대회를 통해 K-1 다이나마이트와 치열한 인기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PRIDE는 2006년 6월 야쿠자 연계설 때문에 후지 TV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하며 급격히 추락했고, 고작 반년을 버틴 후 UFC의 주최사인 ZUFFA에 매각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ZUFFA 측은 본래는 ‘미국엔 UFC, 일본엔 PRIDE’의 형태로 PRIDE를 이어나가겠다고 발표했으나, 야쿠자나 TV 방영권 등 무대 뒤의 갖가지 난제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며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며 포기해 이제 PRIDE를 다시 볼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RIDE가 후지 TV에서 쫓겨나던 날은 아직도 필자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공교롭게 그날이 PRIDE 주간 프로그램 녹화 날이어서 방송국에 출근했는데, PD들도 “큰일이네요.”만 연발할 뿐 사태의 심각성은 모두에게 제대로 와 닫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 전문가로서 당시 이미 TV 방영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성민수 위원 같은 경우 PRIDE가 큰 위기에 빠져 있고 이대로라면 단체의 생존이 어렵다고 여러 차례 글을 쓰기도 했는데, 필자를 비롯한 많은 격투기 업계 사람들은 ‘PRIDE는 괜찮다. 후지 TV의 방영권은 수익의 한 부분이었을 뿐 티켓 판매 등 다른 수입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PRIDE 측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거기다 PRIDE 측은 본사를 아예 미국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한다는 희망찬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는데, 돌아보면 다 부질없는 얘기들이었을 뿐 PRIDE는 후지 TV를 잃으며 두 날개가 꺾인 독수리 꼴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PRIDE를 추억하면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든다. 가장 화려했고, 가장 치열한 승부가 펼쳐졌으며, 팬들의 충성도 또한 이상할 정도로 높았으나, 무대 뒤에서는 그리 깨끗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야쿠자 연계 부분은 너무 민감한 문제니 제쳐 놓더라도, 약물 사용 문제나 대한민국 파이터들에 대한 박한 처우 등은 아직까지도 관계자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다. 나중에 PRIDE 같은 규모의 일본 단체가 혹시 다시 생기더라도 그런 문제들은 꼭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UFC

 

2015년 현재, 세계 종합격투기의 세력 구도는 UFC의 철저한 독점 체제로 굳어진 상태다. 마치 프로레슬링에서 미국의 WWE가 그렇듯이, 2-3위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성을 구축했다고 할까.

 

UFC가 시작된 해는 K-1과 마찬가지로 1993년이다. 이 역사적인 출발을 기획한 사람은 그레이시 가문 최고의 전사 엘리오의 큰아들 호리온이었다. 일찍이 브라질 내에서 이종격투기 최강자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나 삼촌들 밑에서 자란 호리온은 소싯적부터 가슴 속에 커다란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있었다. 간단한 꿈이었다. 미국에 주짓수를 보급하면 자연히 전 세계로 퍼질 것이고, 그레이시 가문이 널리 유명세를 떨칠 거라는 게 호리온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고향 브라질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호리온은 주짓수를 보급하는 동시에 타류 무술가들과 계속 싸워 이겨나가며 주짓수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우연히 인기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지의 눈길을 끌었고, 그곳에 실린 호리온의 기사를 본 광고 제작자 아트 데이비가 호리온과 의기투합하며 UFC 대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존 최고의 격투기대회 UFC (출처 : 게티이미지)



첫 UFC 대회는 대혼란 그 자체였다. 네덜란드의 싸움꾼 제랄드 고르듀가 180kg가 넘는 거한의 스모 선수 테일라 툴리의 입을 발로 걷어차 툴리의 치아 세 개가 부러지며 두 개는 고르듀의 발에 박히고 하나는 중계석으로 날아갔다. 이미 일본 판크라스에서 종합격투기 경험을 많이 갖고 있었던 켄 샘락이 길거리 싸움 250전 전승이라는 패트릭 스미스를 하체관절기로 제압하자, 당사자인 스미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으나 영문을 모르는 관중들은 야유하기에 바빴다. 팬들 뿐만 아니라 현지 중계진에게도 이런 아수라장은 처음이었기에, 해설자들은 그저 감탄사만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날 모든 출전자들 중 가장 볼품없는 체격이었던 호이스 그레이시(주최자인 호리온의 동생)가 마법 같은 그라운드 기술로 훨씬 더 크고 강해 보이는 선수들을 제압하고 우승하며 이 날은 세계 종합격투기 역사에 길이 남을 하루가 되었다. 세계 무술계는 난리가 났고, 그레이시 가문과 주짓수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TV 광고를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PV가 무려 86000개나 팔리는 등, 대회 결과도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피’, ‘죽음’ 등의 자극적 문구를 내세웠던 마케팅 방식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UFC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특히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존 맥케인이 UFC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는데, TV에서 폭력적 내용을 없애 깨끗한 미국 사회를 만들자던 그의 눈에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식의 홍보 전략을 택하고 있던 UFC가 어떻게 비쳤을 지는 뻔하다. UFC 대회를 보고 경악한 그는 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 ‘Human cockfight!" (인간 닭싸움이로군!)

 

맥케인을 비롯한 여러 정치가들이 힘을 모으자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UFC가 금지되기 시작했다. UFC는 영세 서커스단처럼 이도시 저도시를 넘나들며 항상 경찰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대회를 개최해야 했다. 대회 직전에 판사의 명령으로 갑자기 주먹을 쥐고 때리지 못하도록 룰이 바뀌는가 하면, 이미 받아 놓은 개최 허가가 갑자기 취소되어 대회 전날 선수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UFC가 TV업계에서 완전히 쫓겨나자 선수들은 프로레슬링이나 일본 업계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이때 나타난 게 바로 카지노 재벌 로렌조 퍼티타였다.

 

당시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네바다 주의 커미셔너도 겸직하던 퍼티타는 UFC 측이 네바다 주 측에 개최 허가를 신청하며 종합격투기란 스포츠를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지만 선수 및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종합격투기의 진정한 매력에 빠지게 된 퍼티타는 결국 형 프랭크 퍼티타, 처남 블레이크 사르티니와 함께 주파 사를 설립해 UFC를 200만 달러(한화 약 22억 6천만 원)에 인수했다.

 

퍼티타의 오랜 친구인 데이나 화이트를 대표로 한 주파 사는 우선 뉴저지 주 체육위원회와 손잡고 현재의 종합격투기 룰을 확립해 스포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 이어 퍼티타 회장의 인맥을 총동원해 네바다 주에서 대회 개최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하고, 케이블 방송 업계로 복귀해 PPV 판매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플랫폼도 갖췄다. 이어 더 이상 ‘피의 스포츠’가 아닌 ‘고품격 격투 스포츠’라는 마케팅, 즉 ‘우리 UFC가 달라졌어요.’란 홍보에 수백 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흥행 성적은 극도로 저조했다. 그나마 반짝했을 때가 올드 스타인 켄 샘락을 데려왔던 UFC 40 정도였을 뿐, 그 밖의 대회들의 성적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워내려 했던 티토 오티즈는 단체와의 트러블로 경영진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고, 척 리델이 어느 정도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때까지는 마니아들 사이에서의 인기였을 뿐, 메인스트림 미디어와 일반 팬들은 쉽사리 접근해 오지 않았다. 주파 사의 적자는 계속 누적되어 급기야 퍼티타가 데이나 화이트에게 UFC 사업을 접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때 쓰러져가던 UFC를 구해낸 게 바로 리얼리티 쇼 '‘The Ultimate Fighter‘(디 얼티밋 파이터, 이하 TUF)였다.

 

당시 미국은 리얼리티 쇼의 전성 시대여서 이미 복싱과 프로레슬링에서도 그런 컨셉의 쇼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즉, 종합격투기를 다룬 MMA쇼가 나온 건 어찌 보면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고, 젊은 남성층을 공략하려던 신생 채널 스파이크 TV라는 딱 맞는 파트너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스파이크 TV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컨텐츠인 UFC의 리얼리티 쇼에 제작비를 대려 하지 않았다. 이미 3천만 달러(한화 약 341억 원)의 누적 적자에 허덕이던 퍼티타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스파이크 TV가 요구하는 대로 TUF에 천만 달러 (한화 약 113억 원)의 제작비를 투자하기로 한 것이었다. 단, 이것이 UFC에 대한 그의 마지막 투자라는 전제 하에.



최강의 격투기 선수와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UFC (출처 : 게티이미지)



벼랑 끝에 선 UFC 입장에서는 마지막 도박이었지만, 거기서 잭팟이 터졌다. 스파이크 TV는 당시 미국 케이블 업계에서 최고의 인기 프로 중 하나로 꼽히던 WWE 로우를 방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다음에 TUF를 편성하자 프로레슬링의 시청자들 상당수가 TUF로 유입되었다. 거기다 악동 크리스 리벤의 대활약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등 방송 안에서 온갖 드라마가 속출하자 시청률은 계속 상승하며 UFC는 저절로 미국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했던 피날레 대회에서는 포레스트 그리핀과 스테판 보너가 종합격투기 역사에 길이 남을 난타전을 벌이며 결국 UFC를 역사상 최초로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렸다. 많은 기자들은 이 때야 말로 ‘그동안 수많은 돈을 써오며 미디어에 좀 봐달라고 애원하던 UFC에게 처음으로 미디어가 달려들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얘기한다.

 

TUF의 성공과 함께 UFC는 완전히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라이벌 단체들인 PRIDE와 스트라이크포스, 어플릭션 등을 모두 사들이는가 하면, 경량급 단체인 WEC와의 통합으로 경량급으로 체급을 넓히고 여성부도 신설하는 등 숨 쉴 틈 없이 규모를 키워 온 UFC는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종합격투기 단체가 되었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종합격투기 하면 ‘Mixed Martial Arts'라는 본래 표현보다 'Ultimate Fighting'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할 정도고, 유명 TV 쇼나 스포츠뉴스에서 UFC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건 이제 그들에겐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현재 UFC 최고의 스타로 꼽히는 론다 로우지와 코너 맥그리거는 웬만한 유명 복서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PPV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현재 UFC 해설을 맡고 있는데, 가장 아쉬운 점은 미국이나 브라질과의 시차 때문에 늘 주말 오전에 생방송 중계가 나가다 보니 많은 팬들이 단잠을 취하다가, 혹은 결혼식에 가다가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나이 어린 팬들 같은 경우 필자를 만나면 정말 생중계를 보고 싶어 TV 채널을 돌렸다가 일요일 아침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어머니께 한 대 맞았다며 서러워하기도 한다. 오는 11월 28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UFC 대회는 이런 팬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추성훈, 김동현, 벤 핸더슨 등 대한민국 혹은 한국계 스타 파이터들 뿐만 아니라 슈퍼스타 미르코 크로캅까지 참전하는 멋진 대회인만큼 꼭 현장에서, 사정이 안 되신다면 TV 생중계를 통해 즐겨보도록 하자.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