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태프만 아는 아찔한 상황들.. 왜 도망가나 했더니
[오마이뉴스 김윤정 기자]
2016년 <혼술남녀> 이한빛 PD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관행'을 이유로 묵인되어온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방송 스태프들은 주 100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드라마 스태프는 이런 자신의 처지를 '염전 노예'에 비유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바뀌는 세상도 슬프지만, 누군가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세상은 더 슬픕니다. 오마이뉴스는 방송 스태프들의 더 나은 일터를 위해 이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편집자말>
첫날 촬영은 서울 중심에서 약 30km 떨어진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시작됐다. 집합 시간은 아침 8시. 촬영장 집합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오전 6시에 출발하는 스태프 버스에 탑승해야 했다. 늦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5시에는 눈을 떠야 했다.
스태프 버스는 여의도, 상암동, 목동, 일산 등지에서 정차한다. 방송국이 밀집된 장소들이다. 하루 6~7번 장소 이동을 하고, 장비차·의상차·발전차·스태프 버스 등에 배우들의 차량까지 합치면 적어도 한 번에 10대의 차량이 이동하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개별 승용차로 이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체험해보니, 이런 주차 공간 확보나 이동 효율성의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이동 시간은 잠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태프들에게,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시간이었다.
"커피 없어? 커피! 커피!"
스태프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연출, 카메라, 조명, 그립(장비), 동시녹음, 소품, 의상, 분장 등 스태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아침 기온은 24도. 살인적인 무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아침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스태프들은 그늘 한 점 없는 곳에서 무거운 장비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고, 살짝 그늘진 곳에 모니터와 낚시 의자가 세팅됐다.
그늘에 앉은 감독은 앉자마자 커피를 찾아댔다. "커피 없어? 커피 왜 안 와?" 이른 아침부터 햇볕 아래 몸을 움직인 모두에게 차가운 커피 한 잔이 간절했던 순간이었지만, 이를 입 밖에 내고 요구할 수 있는 이는 감독뿐이었다.
장난처럼 외치던 감독의 커피 요구에 진짜 짜증이 섞일 즈음, 제작부 막내가 멀리서 커피를 들고 달려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현장에 있는 스태프는 50명이 넘는데, 배우와 엑스트라까지 합치면 70명도 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의 손에 들린 커피는 달랑 8잔. 커피는 감독과 스크립터, 조명감독, 촬영감독, 동시녹음기사, 제작PD 등의 손에만 쥐어졌다. 덕분에 나는, 처음 간 현장에서 누가 이 현장의 우두머리들인지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커피는 방송 스태프들의 오픈 채팅방인 '방송계갑질 119'의 핫한 주제 중 하나다. '오야지(각 파트장을 일컫는 은어)'에게만 주는 커피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오면, '중요한 이야기도 많은데 커피 얘기나 하고 있을 때냐', '커피만 주면 노동 환경은 내버려 둬도 되느냐'는 핀잔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커피 논란을 지켜볼 때마다, '이게 이렇게 팽팽하게 맞설 주제인가'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커피에 대한 불만은 단지 "나도 커피 좀 먹자!"가 아니었다.
너나없이 고생스럽고 피곤한 현장. 하지만 특정인의 손에만 쥐어지는 차가운 커피는,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리는 '원 팀(One Team)'이 아니라, 커피를 손에 쥔 이들의 지시를 받는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특정인의 손에만 쥐어지는 커피를 보며, 나는 이곳에서 커피 한 잔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현실을 자각해야 했다. 오로지 보람 하나로 고된 노동을 견디는 스태프들에게, 이런 자괴감과 박탈감만큼 큰 상처도 없다.
큐시트에서 시간이 사라진 까닭
촬영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큐시트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촬영해야 할 신들과, 이동해야 할 장소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봤던 큐시트에 비해 뭔가 허전했다. 전에는 스태프들의 집합 시간, 배우들 콜 시간(호출 시간), 촬영 시작 시간과 대략적인 이동 시간 등이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시간 정보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위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촬영 시간 때문에 다들 난리라, 요즘엔 시간 정보를 최대한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보를 우려한 '꼼수'였다.
큐시트를 보며 그날 촬영해야할 분량을 확인한 스태프들은 "오늘은 일찍 끝나겠는데? 12시는 안 넘을 것 같아!"하며 기뻐했다. 아침 8시부터 자정이면 16시간, 식사 시간을 빼도 14시간을 일하는 셈인데, 이 정도가 이들에게는 기쁠 정도의 노동시간이라니.
그나마 최근 밤샘 촬영이 줄어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주 68시간 이상 초과 노동 금지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시안게임 중계로 인한 결방 때문이었다. 지상파 드라마에 비해, 아시안게임을 중계하지 않는 종편이나 케이블 채널 드라마 스태프들은 여전히 밤샘 촬영이 이뤄지고 있다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경기 중계 등으로 결방이 되면, 방송사와 제작사 등은 시청률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울상을 짓게 마련인데, 스태프들에게는 한숨 돌릴 여유가 허락되는 것이다.
집나간 휴식 시간을 찾습니다
밤샘 촬영까지 각오하고 들어온 현장이건만, 이번 주는 널럴하다는 이야기에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다. 하루 20시간 이상 노동했다는 제보들을 많이 접했던 터라, 하루 15시간 정도의 노동 시간 체험은 너무 약한 게 아닐까 걱정됐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촬영 시작 10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송 스태프들의 비상식적인 노동 시간을 이야기할 때, 제작사/방송사 관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대기 시간이 많아 생각만큼 힘들진 않다"는 이야기였다. 각 파트의 업무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 다른 파트에서 일을 할 때 돌아가며 휴식을 취한다는 이유였다.
또, <서른이지만> 사망 스태프 노동 시간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SBS 홍보 관계자는 "촬영 시작-종료 시간은 맞지만, 휴식시간을 감안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휴식시간을 노동 시간에 넣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내용의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김유경 노무사(돌꽃 노동법률사무소)는 "관리자의 지휘 감독 아래에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어려운 시간은 대기 시간으로 보아 근로시간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그 기준에 맞춘 휴식시간이 있는 촬영장은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스태프들에게 '자유'가 허락된 시간은 점심/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스태프 버스가 현장에 도착하면 곧바로 각자의 업무로 달려갔고, 촬영이 끝나면 빠른 속도로 현장을 정리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연출, 카메라, 조명, 미술, 음향 등 각자 파트에 속한 이들의 손발은 척척 맞아떨어져 누군가에게 '여유 시간' 따위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스태프 버스에서 내려 장비가 세팅되기까지 약 40분 동안은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한 장소에 1~2분 멈춰있는 일도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촬영이 시작되면 조명-카메라-음향 스태프들은 각자의 장비를 붙들고 장비와 한 몸이 되어 움직였다. 분장, 의상 스태프들은 모니터 화면 앞에 옹기종기 모여 화면 속 배우의 메이크업이 땀으로 지워지진 않았는지, 옷에 실오라기 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삐져나오진 않았는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서로 다른 앵글을 담아내느라 같은 장면을 짧게는 3번, 많게는 6~7번까지 반복적으로 찍었고, 이때마다 수많은 장비와 사람이 움직여야 했지만, 그 사이 소요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각자의 움직임과 호흡이 태엽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누구 하나 설렁대거나 템포를 삐끗하면, 전체 스태프들의 박자에 리듬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 동안 여유가 허락된 이들은, '기장님'이라 불리는 운전 스태프들뿐. 하지만 이들에게는 스태프들이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또 다른 업무가 존재했다.
귀가 대신 찜질방
촬영시간이 길어질수록 발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스태프가 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서 있어야 했다. 해가 떨어질 무렵부터는 넉넉하게 맞던 운동화가 터질 듯 조여왔고, 종아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촬영 내내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이들은, 오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이들과 동일했다.
마지막 신 촬영이 시작되면 필수 인력을 제외하고는 철수 작업이 시작된다. 세팅하는데 40분 정도가 걸렸으니, 철수에도 30분 정도는 걸리겠거니 싶었는데, 감독의 "컷!" 소리가 끝나자마자 5분 만에 정리가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야외 촬영이 있는 날은, 하루에 적어도 5~6곳을 이동하며 촬영했다. 출퇴근까지 합치면 하루에 적어도 7~8번 이동하는 셈인데, 그때마다 스태프 버스 안에는 그 흔한 라디오 소리도 없이,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스태프 버스 탑승 장소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나는 귀가할 땐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이래도 새벽 1시 30분 전에 도착한 날이 없었다. 하루 종일 땀에 찌든 옷을 갈아입고, 샤워라도 할라치면 2시가 훌쩍 넘었다. 자정께 끝나도 이러한데, 현장 종료가 새벽 1~2시를 넘는 날이면 4시 전에 눕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다음날 버스 탑승시간은 변함없이 6시. 사정이 이렇다 보니, 꽤 많은 스태프가 귀가 대신 찜질방 휴식을 택했다. 집합 장소 인근 찜질방에 가면 적어도 왕복 2시간 정도의 취침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스태프들이 휴차일이면 꼭 해야 하는 일이 빨래였다. 5일 만에 집에 가면 5일 치의 빨래가, 일주일 만에 집에 가면 일주일 치의 빨래가 가방에 쌓이기 때문이다. 한 스태프는 "짧게는 3일, 길게는 열흘 만에 귀가하고, 다시 일주일 치의 옷과 속옷을 챙겨 일터로 향한다"고 했다. 한 번 집에서 나서면, 다음 귀가에는 기약이 없었다.
촬영 3일 차, 잠과의 전쟁
종일 야외에서 일한 피로가 찜질방에서 자는 쪽잠이나 3~4시간의 잠으로 온전히 풀릴 리 없었다. 내가 현장에 나갔던 날은 스태프들도 이틀 휴차를 끝내고 돌아와 그나마 다들 컨디션이 나았지만, 이틀, 삼일 촬영이 이어질수록 눈에 띄게 피로가 쌓여갔다.
고작 3일 체험에 불과했지만, 3일 째 되는 날에는 나도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이틀째까진 어찌어찌 버텼는데, 3일째 되는 날에는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버텨보자'는 쪽과, '꼭 3일을 채워야 할까? 이미 충분히 본 것 같은데 이틀 체험도 충분하지 않을까'하는 쪽의 자아가 싸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스태프 버스를 타러 가니, 다들 표정이 비슷했다. 다만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희망으로 버티고 있다면,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 달랐겠지만. 너나없이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취침 자세를 취했다. 5분쯤 잔 것 같은데, 버스는 어느새 촬영장에 도착해있었다.
마지막 날은 다행히 오전 내내 세트장 촬영이었다. 세트장 촬영은 스태프 모두가 즐거워하는 일이었다. 일단 시원했고, 물과 얼음이 있었고, 화장실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또, 가정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세트장이라 군데군데 앉을 곳도 많았다. 이건 안이나 밖이나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카메라, 조명, 오디오 스태프들에게는 소용없는 장점이었지만 말이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데다, 오랜만에 시원한 장소에 들어오니 다들 이젠 잠과 싸워야 했다. 이때부턴 나도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장비를 옮기는 동안 10분 휴식이 주어졌는데, 잠시 안 보이는 곳에 가 앉아 있는다는 게 30분이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른 스태프에게 "촬영 시작됐는데 왜 계속 앉아있느냐"는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스태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은 떴지만 사실상 졸고 있는 사람, 아예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눈꺼풀과 싸우느라 정신없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스태프들은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후 두 달 째 이런 패턴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으니, 고작 3일 된 내 피로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이동하며, 스태프들은 "와 완전 졸았다", "어떻게 촬영했는지도 모르겠어", "앞에 뭐 했는지 기억도 안 나"하며 웃었다. 장난스럽게 오간 대화였지만, 아찔한 내용이기도 했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상황에서, 안전사고의 위험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스태프들은 식사 시간에도 밥 대신 잠을 택했다. 다들 익숙한 일인지 "그냥 잘래"라는 말에 누구 하나 "먹고 자"라든지 "밥은 먹어야지"하고 말을 보태지 않았다. 첫날엔 두어 명 정도가 밥 대신 잠을 택했지만, 셋째 날에는 대여섯 명이 밥을 걸렀다.
일당 준다더니... 자정 넘겨 일해도 추가 수당 0원
이렇게 일한 스태프들의 임금은 보통 일당으로 계산된다. 대부분이 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구두로 '하루 얼마'로 정하거나, 카메라·조명 등을 계약할 때 장비나 인건비 등을 구분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계약하는 이른바 턴키 계약(일괄 도급식 계약)으로 현장에 나오게 된다. 사실상 '오야지'라 불리는 도급 업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로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휴차가 생기는 날엔 당연히 일당이 나오지 않는다. 황당한 건, 자정을 넘어 사실상 이틀째 촬영이 이어져도, 일당은 하루 치만 지급된다는 사실이다. 추가 수당? 당연히 없다. 주 68시간 이상 초과근무 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오자, 일부 현장에서는 월요일 20시간 촬영-화요일 휴차-수요일 20시간 촬영-목요일 휴차-금요일 20시간 촬영-토요일 휴차. 이런 식으로 촬영시간을 배분해, 일주일 치 노동을 시키고도 일당은 3일 치만 지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하는 현장 막내급 스태프의 일당은 10만 원 안팎. 조명·카메라·음향 등 기술직군이 그나마 나아 이 정도고, 분장이나 소도구 등은 이보다 못하다. 이 금액에는 식비 등도 모두 포함되어 있어 별도의 식비도 지급되지 않는다. 점심/저녁 두 끼 사 먹고 세금까지 제하면, 20시간 일하고도 하루 일당이 8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이가 태반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찜질방 비용이었다. 촬영 종료가 자정이 넘지 않으면 찜질방 비용조차 지원되지 않았다. 스태프로 일했던 3일 중 하루는 밤 12시를 조금 넘겨 촬영이 끝났고, 하루는 밤 11시 40분께 끝이 났다. 11시 40분께 끝난 날, 진행팀 스태프가 스태프 버스에 올라 "자정 전에 촬영이 끝나 찜질방 비용 지원이 어렵다"고 했다. 자정 넘어 촬영이 끝난 날보다 더 먼 곳에서 촬영이 있었던 날이었고, 때문에 촬영은 전날보다 40분 정도 일찍 끝났지만, 스태프 버스가 찜질방에 도착한 시간은 오히려 더 늦었다. 오로지 촬영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따져서 생긴 아이러니였다. 스태프들이 실제 몸으로 느끼는 피로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하다 사고 나도 치료비는 각자 부담
이런 극도의 피로 상태에서, 안전사고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몇 주 전까지만 해도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무더위가 이어졌다.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 사망 사건에 일사병이 의심되면서 해당 작품에 관심이 쏠렸지만, 여러 스태프들은 일하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스태프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친 일이 아니고서는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아니, 날 수 없었다. 혹여라도 일이 새나가면, 발설한 스태프는 다신 방송 일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일하다 쓰러지거나 크고 작은 부상이 있을 경우 그날 치료비용은 제작사에서 내지만, 이후 추가 비용이 든다면 자비로 부담한다. 최근에는 제작사가 스태프들의 상해 보험을 들어주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15년 차 스태프는 "방송 일 하는 동안 딱 3번 상해 보험 들어봤다. 그나마도 다 최근"이라고 했다. <화유기> 스태프 추락사고 이후 바뀐 추세라는 것이다. 이 스태프는 "그나마도 보상 기준이 최하인 보험을 들어줘서, 많이 다칠 경우 치료비도 제대로 안 나오고, 휴업손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악역 만들 수밖에 없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
이렇게 3일 간의 스태프 체험이 끝이 났다.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는 그 기간 동안,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허리, 등 목까지 뻐근해졌다. 3일간 쌓인 피로는,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히 떨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의 스태프들은,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묵힌 피로를, 앞으로도 당연한 듯 몸에 계속 쌓아갈 것이다.
그동안 여러 루트로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 이야기를 접하면서, 드라마 현장은 막연하게 잔뜩 쌓인 피로로 한껏 예민해진 이들로 인해 삭막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현장은 달랐다. 스태프들은 제대로 못 자고 밥까지 거르며 일하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과 만족감으로 그 모든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견뎌내고 있었다.
막내급 스태프들을 향한 갑질과 질책이 가득할 거라 예상했지만, 감독은 자신의 지시를 빨리 이행하기 위해 달리는 스태프에게 "천천히 가도 돼! 뛰지마! 넘어져!"라고 소리쳤다. 임시 파견 나온 보조 스태프인 내게 "많이 힘들지? 그래도 도망가면 안 돼~"라는 장난 섞인 격려를 해주는 이도 있었다. '오야지'들은 점심 후 스태프들의 피로가 극에 달할 무렵, 돌아가며 전 스태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하지만 암만 인격적으로 훌륭한 연출자라도 예정된 시간 안에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는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고, 대개 그 악역은 현장의 책임자인 감독이었다. 스태프들은 감독이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따금 예민함과 까칠함을 표출하는 감독에 대해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누구 하나를 악역으로 몰아 비난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혼술남녀> <화유기>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최근 큰 사고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의 비난도 해당 드라마의 책임자인 PD에게 쏠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악역을 만들 수밖에 없는 제작 환경이다. 이 안에서 스태프들은 노동자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했고, '꿈' 하나만 바라보며 업계에 들어온 청년들은 꿈을 볼모로 '열정 페이'를 당연하게 강요 받고 있다. 또, 이런 환경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업계를 떠나는 이들도 많다. 중간에 스태프가 반 이상 교체되는 현장도 허다하지만, 그 빈자리는 꿈을 좇아온 또 다른 청년에 의해 금세 채워진다.
충분한 제작 기간과 제작비가 보장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대다수 스태프들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프리랜서', '파견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주 68시간', '주 52시간' 초과 금지만 외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180829074800460?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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